워털루의 나폴레옹, 딱 한 번의 선택으로 몰락하다니

[서평] 슈테판 츠바이크의 역사평설 <인류사를 바꾼 순간>

등록 2014.01.18 21:09수정 2014.01.1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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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사를 바꾼 순간> 겉그림
<인류사를 바꾼 순간> 겉그림우물이 있는 집
삶은 순간의 연속이다. 지금이 이어져 과거가 된다. 과거가 축적되면 인생이란 결과물이 생성된다. 그리고 매순간 우리는 선택을 한다. '지금 일어날까, 점심은 무얼 먹지, 지하철에서는 어느 자리에 앉을까'란 지극히 사소한 질문부터 조금은 무거운 질문까지. 스스로 답해가며 미래를 만들어 간다.

아, 누가 그랬던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지금 스스로의 선택이 미래를 움직인다. '인과관계형'으로 인생을 서술하자면, 미래는 현재의 결과다. 사실 그 선택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지나봐야 안다. 비장하게 선택을 하지만,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니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당시에 가볍게 했던 선택이 인생에 긴 꼬리를 드리울 줄은 몰랐을 게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선택이 인류사에 이렇게 짙게 여운을 드리울 줄은 몰랐던 이들이 있다. 전기작가로 유명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바로 이점에 주목했다. 15세기 투르크 황제의 비잔틴제국 정복부터 20세기 레인의 러시아 귀환에 이르기까지. 서양 각 국에서 일어난 12개의 역사적 사건들을 소묘형식으로 묶어 <인류사를 바꾼 순간>이란 책을 썼다.

시대를 뛰어넘는 영원한 결정이 단 하루, 단 한 시간, 어떨 때는 단 1분에 응축된 그 같은 극적으로 완성된, 운명적인 시간들은 개인의 삶에서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드물다. 몇몇 그러한 별이 빛나는 순간들-내가 이렇게 지칭하는 것은 별들이 허무의 밤을 밝히듯 그것들이 반짝이며 불변의 상태로 온 세상을 비추기 때문이다-을 나는 여기서 상이한 시대들과 지역들로부터 되살려 보고자 한다.(<인류사를 바꾼 순간> 머리말에서)

# 장면 1: 워털루의 그루쉬, 나폴레옹을 몰락시키다

나폴레옹 휘하의 그루쉬 장군은 지금 고민에 빠져있다. 분명 나폴레옹은 그에게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 명했다. 그러나 아침부터 들리는 대포소리가 심상찮았다. 나폴레옹의 본대가 있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게 틀림없었다. 장교들은 그를 재촉한다.

"대포가 있는 방향으로 신속히 돌진해 황제를 도와야 합니다."


장교들은 나폴레옹이 영국군을 공격해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루쉬는 선택해야 했다. 명령대로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해야 하는가, 지금이라도 나폴레옹 본대와 합류해 영국군과 싸워야 하는가. 만약 예상이 틀렸다면 자신은 황제의 명을 어긴 것이 된다.

그는 고민 끝에 선언한다. 황제로부터 다른 지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 자신에게 부여된 명령에 충실하겠노라고. 세계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지금 그루쉬가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스스로의 믿음과 가시적 징조에 따라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프랑스는 구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주체성 없는 인간은 여전히 정해진 명령에 복종할 뿐 운명의 외침에 따르지 않는다.(<인류사를 바꾼 순간> 154쪽)

전투가 끝난 후, 나폴레옹은 더 이상 황제가 아니었다. 그의 제국, 그의 왕조, 그의 운명은 거기서 함께 끝났다. 20년의 세월 동안 이룩한 성과가 부하가 내린 순간의 선택으로 산산조각 났다.

# 장면 2: 레닌의 귀환과 통행 요청서 한 장의 무게

독일군 참모차장 루덴도르프 앞에는 한 장의 문서가 놓여있었다. 레닌 일행이 독일을 경유하겠다며 제시한 조건이 쓰여 있었다. '차량에 치외법권이 인정될 것, 입국 및 출국 시에 여권이나 신분검사를 하지 않을 것, 여행에 대한 정상적인 요금은 지불할 것, 차량을 떠나라는 명령도 안 되고 스스로 떠나지도 않을 것'

그는 별다른 의견 없이 찬성했다. 후에 그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결단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20세기 세계사를 송두리째 바꾼 그 선택에 대해서 말이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레닌은 그리 영향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스위스에 머물던 그는 러시아 혁명을 꿈꾸고는 있었으나, 다른 세력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가 퇴위해도 그의 귀국길은 막혀있었다. 그가 머물던 스위스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에 둘러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혁명가인 레닌에게 이들 국가가 순순히 길을 내줄리 만무했다. 그래서 독일 측에 요청을 했던 것이다.

레닌이 탄 기차가 우여곡절 끝에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핀란드 역으로 진입했다. 역 앞 광장을 가득 매운 수만 명의 노동자가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그는 천천히 내려 고국에서의 첫 연설을 시작한다. 거리는 진동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개인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사건들

이밖에도 찬란한 인류문화가 꽃피었던 비잔틴제국이 작은 성문 하나를 실수로 열어놓은 탓에 잿더미가 돼버린 사건, 프랑스의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가 한 무명 장교의 하룻밤 영감에서 탄생된 이야기 등은 우리에게 삶의 순간들을 돌아보게 한다. 

단 한 번의 수용, 단 한 번의 거부, 너무 이르거나 늦는 것이 이 순간을 수백의 종족들에게 있어서 돌이킬 수 없게 만들며 한 개인의 삶과 한 민족의 삶, 나아가 전체 인류 운명의 흐름을 결정짓는다.(<인류사를 바꾼 순간> 머리말에서)

물론 모두 결과론적인 얘기다. 그러나 사건들은 우연의 우연을 타고 넘어 전혀 의도치 않은 결말을 만들어낸다. 무채색의 수묵화로 시작해 화려한 팝아트로 마무리되는 그림이랄까. 세상의 얄궂은 변덕은 인류사 전체 흐름을 바꿔놓았다.

더군다나 츠바이크 특유의 문학적 서술은 읽는 재미를 더 한다. 특히 사형집행 직전에 사면을 받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는 한편의 서사시로 표현됐고, 톨스토이의 비극적인 말년은 희곡의 형식을 빌렸다. 문학 거장들에게 보내는 츠바이크의 작은 인사가 아니었을까. 이름난 전기작가지만, 역사적 사실엔 섣부른 첨삭을 하지 않는다. 난 그래서 그가 좋다. 그의 글이 좋다.
덧붙이는 글 <인류사를 바꾼 순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관우 옮김, 우물이 있는 집 펴냄, 2013.12, 1만6천원

인류사를 바꾼 순간 - 전기문학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의 역사 평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관우 옮김,
우물이있는집, 2013


#인류사를 바꾼 순간 #슈테판 츠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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