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과 형님 딸
이종득
그러나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아 키우면서 5년 만에 통장에 잔고는 0이 되었고, 야금야금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내년에는 잘 되겠지 싶었다. 아내와 함께 각자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지역 경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앞집 뒷집 건너 집 할 것 없이 다들 죽겠다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농한 지 어느덧 13년이 지났다. 어제 현재 내가 진 빚을 정리해 보니 1억2000만 원 정도가 되었다. 농협의 마이너스 통장에는 2000만 원. 보험회사 신용대출 2500만 원. 산림조합 담보대출 1700만 원. 신용협동조합 담보대출 3500만 원.
아내 이름으로 받은 농협대출 2000만 원 중에 400만 원 정도가 남아 있었다. 카드 회사 두 곳에 각각 500만 원씩 1000만 원 정도였다. 이 빚 중에 사업장 운영자금으로 받은 대출이 5000만 원이고, 마이너스통장과 보험회사 대출, 그리고 카드 금액은 모두 야금야금 받아 쓴 생활자금이었다.
어머님과 장모님, 두 딸 어떻게 하나... 나는 지금까지 1억5000만 원을 주고 산 1000평의 밭에서 수년째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수한 수입을 단 한 번도 얻지 못했다. 내 품삯조차 마땅하게 계산되지 못하는 농사일이었다. 풋고추도 심어보고, 옥수수도 심어보고, 곤드레 나물도 심어보고, 콩도 심어봤지만 일 년에 매출이 200만 원 정도 나왔다.
아내의 학원 운영도 마찬가지였다. 인구 3만 명 정도가 사는 군소도시에서, 더군다나 고향이 아닌 타향에서의 사업은 사실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았다. 지역에서 줄곧 살아온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하여 이해관계가 되는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하는 일과 생각에 무조건 동의해야 함이 그 중에 가장 큰 난제였다. 그런 거 상관없이 나만 잘하면 되겠지 생각했던 것은 정말 큰 오산이었다.
귀농, 그래서 어려운 것이었다. 지역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경제활동의 질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귀농을 결심한다면 성공적으로 정착할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는 정말 몰랐었다. 나만 정직하고 잘하면 되겠지 싶었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지금은 알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휴대전화에서는 카드사에서 보낸 신용정보 변동이 발생했으니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떴다. 보나마나 신용등급이 낮아졌으니 한도가 줄었다는 메시지이고, 그것은 하루 빨리 연체된 대출금 이자를 납부하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나는 젊은 시절 아껴 쓰며 번 돈으로 어렵게 장만한 집도 2년 전에 팔아 어머님과 장모님 노후자금으로 4000만 원씩 드렸다. 그리고도 혼자 사시는 어머님 병원비(당뇨와 고혈압) 등으로 매월 50여 만 원씩 보내드려야 한다. 두 딸은 이제 초등학생이고, 앞으로 들어갈 돈은 많은데, 정말 살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끝으로 5년 전쯤에 친구가 급하다고 해서 빌려준 돈 2000만 원을 지금도 받지 못하면서 그 돈을 달라고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한 내가 참 잘했다는 마음이 든다. 그 친구가 그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마음을 단 한 번도 갖지 않고 지금도 가끔 통화하며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만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내의 학원에서 공부한 학생 부모가 몇 달치 학원비를 내지 못하고 그만두었어도 그 돈을 받겠다고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것도 참 잘한 것 같다. 내가 당해보니 더욱 절실하게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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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아재양념닭갈비를 가공 판매하는 소설 쓰는 노동자입니다.
두 딸을 키우는 아빠입니다.
서로가 신뢰하는 대한민국의 본래 모습을 찾는데,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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