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의 행복했던 추억과 아픔이 기록되어 있는 교무수첩
송태원
어느 해 3월 어느날 교장실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교장 선생님 : "아이고, 선생님 수고가 많으시죠. 여기 앉으세요."교장실에는 교감 선생님, 교무부장 선생님, 그리고 00부장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먼저 커피와 녹차 그리고 간단한 다과를 나에게 권했고 잠시 어색한 시간 후 교감 선생님은 말을 꺼내었다.
교감 선생님 : "교무부장 선생님이 연세도 있고 한데... 교감연수를 받아야 하는데 연구점수가 모자라서 송 선생님이 도와주면 어떨까 해서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봤습니다."교무부장 선생님은 "나는 체육과고 해서 00대회 작품에 대해 지도할 능력도 안 되고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하게되어 너무 미안하다"고 하였다. 두 손으로 나의 손을 잡으며 "죽어가는 사람 도와준다 생각하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다"고 "교직사회는 좁다, 내가 사립이든 공립이든 자리도 꼭 알아봐주겠다"고 매달리다시피 하며 부탁했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가 절실했던 나는 거절하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의 침묵은 승낙이 되었고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 3개월 동안 학생들과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저녁 늦게(보통9시)까지 보고서 작성과 발표 준비 등을 했다. 다른 날은 혼자서 자료를 찾고 내용을 정리하고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과 기타 등등을 준비했다. 가끔 교무부장 선생님은 밥을 사주었고 누가 주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50만 원 백화점 상품권을 받았다. 00대회 출품작은 최우수상을 받았다. 물론 지도교사는 교무부장 선생님으로 되어 있었다.
최우수상. 나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부끄러웠다.
'이건 아닌데, 이렇게 했어는 안 되는건데.' 단호하게 거절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이런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내 마음의 괴로움은 출근을 할 때마다 계속되었다. 1년을 계약했지만 2학기때 나는 사직서를 쓰고 그만 두었다. 나는 더 이상 선생님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5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교단에 설 수 있었다. 5년 전보다 기간제교사 자리를 구하는 것은 더 힘들었지만 다시 선생님으로 불리우며 학생들과 만날 수 있었다.
임용고시에 도전도 해보았지만 우스운 성적으로 떨어졌다. 매년 기간제교사 자리를 구하며 외줄타기 같은 인생은 계속되었다. 교무부장 선생님의 말은 맞았다. 교직사회는 좁았다. 어느해 기간제교사 자리를 구하던 중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려 간 학교에서 만난 것이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하였다.
첫눈에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어디서 많이 본 선생님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어디서 만났는지 나에게 물어보았다. "차나 한잔하자"고 하며 교장실로 나를 안내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결혼도 했고 애들도 있고 생계를 위해 꼭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부탁한 기억만 난다. 그리고 "난 청탁 같은 것 받는 사람 아닙니다"라는 대답을 듣은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혹시 나빠던 기억 있으면 다 잊고 좋았던 일만 기억하자며 한 번씩 놀러오라"고 하였다. 교장실은 늘 열려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현재 이 시간에도 카페에는 기간제교사의 크고 작은 아픔을 호소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글들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