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
이화장
20세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기를 살아온 우리 삶도 마치 레마르크가 묘사한 광기어린 '군대'와 같이 사상과 자유보다는 훈련과 조직이 우선시되는 사회였다. 지금 조작과 위조로 한국사회를 뒤흔드는 국정원 감싸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박근혜 정권 역시 '광기에 둘러싸인 정권'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레마르크가 이 책을 쓴 지 100년이 다돼가지만, 지금도 우리사회는 증거조작으로 멀쩡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고도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비한 비정상이 판친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우리나라 초대대통령 이승만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오늘의 국정원은 '조작의 대가', 이승만의 정신적 후손들인 것이다.
이승만(1875~1965)은 해방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해 모윤숙(1910~1990)과 미인계를 이용한다. 모윤숙은 해방공간 미군정 치하에서부터 이승만과 밀착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한다. 모윤숙은 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던 인도의 메논 유엔한국위원장에게 자신의 몸을 던져, 그가 1948년 3월 12일 표결에서 남한 단독선거안에 찬성표를 던지게 만든다.
훗날 메논은 이때를 회상하며 자신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머리가 아닌 가슴에 따라 한 결정"이라며 후회했다. 모윤숙 역시 단독정부수립과 이승만을 위해 인도인 메논에게 "속옷을 벗어던지고 논개가 되었다"고 술회했다.
분열과 대립을 책동하는 언론의 희생양 김수임 해방공간에서 미인계정치를 거론 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김수임(1911~1950)이다. 김수임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간첩혐의로 사형당한 여성이다. 가장 큰 죄목은 1949년의 미군 철수 정보를 북한에 넘겨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950년 6월 15일 그녀는 모진 고문 끝에, 민간인 신분임에도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급히 총살되었다.
김수임은 모윤숙과 단짝친구였다. 그래서인지 재판 당시 모윤숙은 김수임을 적극 변호하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유는 당시 좌익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을 부추겨 분열과 대립을 책동하는 언론 때문이었다. 김수임은 한국전쟁 직전 정치적 혼란기에 빚어진 사회적 집단 히스테리의 희생양이 되었다.
AP통신은 지난 2008년 8월 16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기밀이 해제된 김수임 관련 미국측 심문기록을 바탕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이 김수임의 연인이라고 지목한 인물인 존 베어드 당시 미 헌병사령관은 주요기밀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김수임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것이라는 결론이 났다. 당시 윌리엄 라이트 미 군사고문단장도 김수임의 자백이 '물고문에 의한 것'임을 증언했다고 문서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무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종북좌파' 여론몰이와 집단 히스테리가 작동하는 우리의 비정상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탈북한 사람들이 졸지에 국정원과 같은 국가기관의 조작에 의해 간첩으로 둔갑되는 믿을 수 없는 비정상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1874~1965)은 이승만(1875~1965)과 1살 차이로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처칠은 1933년 독일의 히틀러가 집권하자 나치 독일이 조만간 영국을 공습할 것이라며 영국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지만 당시 평화를 바라던 영국 정계에 의해 무시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영국을 공격하여 처칠의 예견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고 결국 그는 영국수상에 임명된다.
1940년 5월 13일 처칠은 의회에서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이외에는 내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연설을 한 뒤 수상에 취임한다. 그리고 6월 4일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국민 연설로 독일 폭격에 연일 시달리는 영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아준다.
"대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들은 바닷가에서 싸울 것이다.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이다. 들판과 시가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구릉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요, 어떤 공포에서도 승리요,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해야 한다. 승리 없이는 생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41년, 처칠은 미국의 참전 없이는 도저히 나치독일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참전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민에 빠진 처칠이 고안해 낸 것이 '미인계'였다.
미인계에 며느리를 이용한 처칠 영국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