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미군기지 일부 전경.
한만송
"삼릉(부평구 부평2동)에는 많은 뮤지션이 하숙했다. 내 기억에만 미8군에 나가는 밴드가 7~8개 팀 있었다. 당시 연습할 공간이 없다보니, 가끔은 하숙집에 들어와 술도 함께 마시고 낮엔 마당에 나와 연습도 함께 했다. 애스컴을 중심으로 인천에만 클럽 50여 개가 있었다. 밴드들은 전국을 무대로 다녔다. 그래도 근거지는 삼릉이었다. 삼릉에 모여 새로운 음악이 나오면 함께 연습하고 어울렸다." 조용필과 함께 '위태한 탄생'에서 활동한 김청산씨는 미8군 뮤지션으로 활동했을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현재도 부평에 살며 8집 음반을 준비하는 '사랑과 평화'의 보컬 이철호씨는 음악인들 중에 부평 사람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20대 나이에 미8군 무대에서 16인조 악단 트럽더스를 이끈 차영수(71·파이오니아 리더)씨는 1970년대 초 주한미군 감축으로 클럽이 축소될 때까지 애스컴시티에는 장교 클럽 4개를 포함해 클럽이 12개 있었다고 증언했다.
"예전에는 삼릉을 제이브이(JV: japan village)라로 불렀어요, 그것에서 문학·군포·미사일부대 등을 포함해 보통은 하루에 악단 16개가 출발했지요. 악기와 연주단을 실어 나르기 위해 요즘으로 말하면 하이리무진 같은 차량들이 대기하고 있었어요. 당시 삼릉에 있던 삼부약국 앞에서부터 길을 따라 쭉 늘어섰던 수송차량을 타려고 늘어선 모습은 장관이었지요."그는 애스컴시티가 미8군 무대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컸고, 그 영향인지 연주 잘하는 사람들 중엔 인천이나 부평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고 회상했다.
1970년 당시 애스컴시티에서 화이트로즈라는 클럽을 운영하기도 한 차영수씨는 "악단이 연주하는 다운타운 클럽이 용산보다 애스컴시티에 많았고, 그 중 컨트리 음악을 연주한 세븐 클럽은 미군들이 유난히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삼익·영창·콜트 부평에 몰린 것, 우연만은 아니다"
인천시 부평의제21실천협의회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자료 '음악도시 부평'에도 부평2동에 뮤지션 수백명이 모여 산 것으로 나온다.
"당시 부평에서 경기도 의정부와 오산 지역 등 미군 클럽까지 악단들을 태우고 다녔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였고, 또 대중교통의 발달이 미흡했던 터라 미군들이 수송까지 담당하던 이곳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삼릉 주변은 이렇게 모여든 악사들로 인해 당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악사들이 모여 사는 독특한 지역이었다."애스컴시티 클럽에서 공연했던 부평 출생 김진호(71)씨도 "당시 이들을 실어 나르던 차량에는 대략 7~9명으로 구성된 악단이 탑승했으니 대략 150여 명의 악사들이 삼릉과 신촌 그 일대 주변에 살았을 것"이라고 기억했다.
"오디션 합격 후 애스컴의 55부대, 121부대 등에서 연주했어요. 그때 삼릉 당구장 앞에서는 각 부대에서 연주할 연주자들을 데려가기 위해 나온 미니버스와 트럭들이 줄을 섰어요. 나도 평택의 비행부대, 파주의 기갑사단 등을 다녔지요. 지역 부대로 가면 대부분 한 달간 연주하고 또 다음 부대로 넘어가길 반복했어요. 당시 오디션문화가 현재의 케이팝(K-Pop) 문화로 이어진 것 같아요."<음악도시 부평>을 발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정유천 인천밴드연합 회장은 "삼익악기, 영창악기와 기타를 생산하는 콜트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악기 공장인데, 이들 업체가 유독 부평에 몰려있다는 것은 단지 우연만은 아니"라며 "현대 대중음악사에 부평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인식해 이제 부평은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적 유산을 발굴하고 계승해 대중문화예술의 체계를 세워야 한다"라면서 "조만간 반환되는 부평미군기지의 역사성을 되찾을 때 음악도시 부평도 간과해선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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