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엔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제주 돌담.
김종성
오름에 있는 무덤도 그렇고 밭에 있는 무덤도 그 주위에 돌담을 쌓아놓았다. 방목하는 말이나 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담이다. 제주도에서는 무덤을 '산'이라 부른다. 그래서 산을 둘러싼 돌담 이름은 '산담'이다 - 본문 가운데제주 여행을 하다보면 마을, 숲, 해변은 물론 오름에 올라서도 까만 돌담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래도 명색이 담인데 제주의 돌담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어떻게 저 혼자 있기도 위태로워 보이는 돌담이 거친 해풍을 막아내며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일까?' 참 신기했다. 어쩌면 저 숭숭 뚫린 구멍 덕에 돌담은 오랜 세월 바람을 막아낸 것은 아닐까.
저자는 제주 돌담은 구멍으로 바람을 분산 통과시키며 바람으로부터 섬의 안전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제주의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니라 바람의 통로다. 섬사람들은 바람을 거스르고는 살 수 없어 바람이 지나갈 샛길을 만들어 주고 바람과 함께 살아간다고. 제주 돌담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니 여행길에 마주치는 다양한 돌담이 그저 까맣게 생긴 흔한 담으로만 다가오진 않을 것 같다.
집담, 밭담, 산담에 이어 잣담 까지 돌이 많은 제주도에선 어딜 가든 이렇게 돌담이 이어져 있다. 검정색으로 쓱쓱 금을 그은 듯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제주도 돌담을 빼고는 제주도를 이야기할 수 없다. 제주 바닷가엔 처음 들어보는 '원담'이란 게 있단다. 해변에 돌을 쌓아 밀물 때 들어온 멸치 등이 썰물 때 나가지 못하게 만든 담이다. 마을에서 돌담을 쌓아 만든 '돌 그물'이다.
밭과 집, 목장, 무덤 등을 둘러싼 검은색 돌담이 구불구불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하여 제주도 돌담은 '흑룡만리'라 불리기도 한다. 주변의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소박한 검은 색 돌담으로 둘러싸인 밭 풍경은 여행자에게 그 자체로 훌륭한 볼거리이다. 규격, 표준화한 것 하나 없이 어느 담을 보아도 구불구불 제각기 다른 모양도 맘에 든다. 척박한 화산토에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누대에 걸쳐 돌을 쌓아올린 오랜 역사까지 담 안에 녹아 있으니 완벽한 예술품으로 손색이 없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는 마을 조천읍 북촌리제주 올레를 걸으면 누구나 드는 의문이 있다. 왜 풍광 좋은 곳만 걷게 하지 않고 굳이 마을을 지나게 하고 도심 한복판을 걷게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출발점이다. 제주올레는 길을 통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과 소통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 본문 가운데제주 4·3 사건을 다룬 보기 드문 영화 <지슬>이 묘사하는 가장 아픈 내용은 총에 내몰린 마을 청년이 동네 사람들이 숨은 굴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장면이다. 제주도 사람들이 척박한 자연환경과 관권의 폭압, 왜구의 노략질 등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서로 상부상조하는 '수눌음' 정신에서 나왔다.
농촌에는 공동목장, 해촌에는 공동어장이 있고, 거의 모든 일은 계 조직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홉 살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이민 간 사람들이 고향 발전을 위해 거금을 희사하는 곳이 제주도이다. 제주도 사람들의 생존 조건이자 자부심이 원천인 바로 그 공동체 의식이 4·3사건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버렸다. 저자가 중산간 마을길에서 만난 고씨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가장 큰 아픔으로 공동체 의식의 파괴를 꼽았다. 한마을에서 대대로 가족처럼 의지하며 지내온 이웃들이 서로 등을 돌린 것만큼이나 불행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후손이 겪은 고초도 못지 않다. 부모가 죽었으니 정상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설사 공부를 했다 해도 연좌제라는 족쇄가 그들을 채워버렸다. 연좌제가 풀린 것은 1990년대 문민정부에 들어서였다. 마을은 마을대로 '폭도 부락'이라고 낙인 찍혔다. 당시 군경이 파악한 제주도 전역의 유격대 숫자는 5백 명. 5백 명 잡겠다고 미국이 '레드 아일랜디'로 지목한 후, 중산간 마을들을 불태우고 초토화시키며 주민 3만 명을 죽였다. 섬 인구의 10분의 1이었다. 광기가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동족에 의한 동족 대학살이었다.
19코스 함덕해수욕장 동쪽으로 서우봉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봉우리를 넘으면 조천읍 북촌리이다. 이곳은 제주 4·3사건을 '공식 활자'로 써서 처음 세상에 알린 소설가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무대가 된 마을이다.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곳이어서 비극을 상징하는 마을이 되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청년은 "현기영 선생을 아느냐"는 저자의 물음에 '순이 삼춘'을 기억해내며 "남자들은 그때 거의 다 죽었다고 보면 된다"고 말한다. 여러 학살터 가운데 하나였던 너븐숭이(넓은 쉼터)에는 '너븐숭이 4·3기념관'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고은숙씨는 사건 희생자의 유족으로, 당시의 일들을 상세히 들려준다.
"제주도 어른들은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너무 무뚝뚝하다"며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는 올레꾼을 본 적이 있다. "대참화로(제주 4.3 사건) 인한 큰 아픔이 내재되어 있으니 어른들 얼굴이 어두울 수밖에 없고, 육지에서 사람들이 와도 아직까지는 마음으로 반갑게 맞을 수가 없다."이후 정부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 대한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추념식을 거행하는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저자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뇌리 속에 그리고 사건 당시의 총탄에 한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등명대 건립비에는 이러한 아픔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혹여 제주 올레 길을 걸으며 "제주도 어른들은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너무 무뚝뚝하다"며 서운했던 감정이 남아있는 올레꾼이 있다면 함덕 해변가의 서우봉을 넘어 조천읍 북촌리 마을에 가볼 일이다.
폭삭 속았수다 - 성우제의 제주올레 완주기
성우제 지음,
강,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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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어른들은 왜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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