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5월 8일,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친 뒤 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했다. 사진은 5월 9일 <한겨레> 15면에 실린 현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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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귀에 들려온 그 이름 석 자 '김기설'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그 김기설일까? 나는 수갑과 포승에 묶인 채로 달려가듯 텔레비전을 향해 걸어갔다. 텔레비전 화면에 뜬 사진 속의 그 인물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라운관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보게 된 그 얼굴은 정말 내가 알던 바로 그 김기설이 맞았다. 순간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숨졌다. 시위 도중 무술 경관으로 구성된 속칭 '백골단'에 의해 쇠파이프로 집단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이에 분노한 이들이 살인폭력 집단인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목숨으로 저항하던 그때였다. 나는 내가 알던 김기설이 분신했다는 뉴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으로 돌아온 나는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 형, 김기설에 대한 미안함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내가 있던 농성장으로 찾아온 김기설내가 김기설을 처음 만난 때는 1991년 3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나와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가 분신자살을 기도하면서 촉발된 대학 농성장에 재야쪽 사람들이 지지 방문차 찾아왔을 때였다. 다른 분들은 한두 번 본 사람인데 유독 한 사람만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가 서울에서 내려온 재야 활동가라는 것을 그의 명함을 받고서야 알았다.
농성 상황 설명을 듣고 난 후 방문한 일행은 당일 경찰에 연행된 이들을 면회하겠다며 일어섰다. 그때 낯모르던 그가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서류봉투를 좀 맡아줄 수 없냐고 물었고 나는 알았다며 건네 받아 들었다. 그러자 명함을 주겠다며 자신의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졌으나 끝내 명함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다른 사람 명함 뒷면에 글로 써 드려도 되겠냐"며 물었다. 그러더니 볼펜을 꺼내 쓴 글씨는 이랬다.
'전국 민족민주 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그런 김기설이 왜 분신을 결행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게 된 후 나는 또 많이 울었다. 1991년 5월 7일이었다. 김기설이 분신을 결행하기 하루 전 날, 일단의 사람들은 김기설이 혹시 분신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김기설과 함께 자취방을 쓰던 임아무개씨가 우연히 김기설의 유서를 발견하면서 부터였다. 당일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취방에 들렀는데 방바닥에 흩어진 몇 장의 종이가 임씨의 눈에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하고 들어서 읽어본 후 유서임을 직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순간 당황한 그는 곧바로 김기설과 같은 전민련 관계자에게 전화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전해들은 사람들이 놀라 '바로 자취방으로 갈 테니 만약 김기설을 보게 되면 그때까지 붙잡아 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 사실을 모르던 김기설이 잠시 후 방으로 들어왔고 임씨는 연락을 받고 온 이들과 함께 김기설을 포장마차로 데리고 가 술을 마시자며 권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잠시 후 사람들은 김기설에게 유서를 들이대며 "이거 유서 아니냐, 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한 것이냐, 당장 네 손으로 찢으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김기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순순히 유서를 받아 제 손으로 찢었다. 그러면서 한 말이 이랬다는 것이다. 미안했다고. 자신이 재야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으면서도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민중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고.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당시 산재 사고로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간 원진 레이온 사건과 동우대학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노동자가 산재로 죽어가도, 어린 학생들이 조직폭력배의 폭력과 경찰의 협잡으로 고통 받아 분신하고, 의문사를 당해도 자신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몹시 고통스러웠다며 그는 울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기설의 선배였던 그들이 "그래도 죽는 것은 안 된다, 살아가면서 우리와 함께 끝까지 싸워나가자, 그럼 결국 우리가 이긴다, 힘내라"며 위로했고 김기설 역시 "이젠 생각을 바꿨다, 방금 유서도 내가 찢지 않았냐, 미안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웃으며 여러 술잔을 다시 나눴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좀 지나가던 그때였다. "잠시 공중전화 좀 쓰고 오겠다"며 김기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따라 나서려 하자 김기설은 "괜찮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 좀 하려는 것이다,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안타깝게 회상하고 있다. 김기설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좀 뭐해서 주저앉은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는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김기설의 마지막이었다. 잠시 동안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결국 김기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제야 사람들은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김기설의 행방을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찾던 김기설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약 두어 시간 후인 8일 오전 7시께였다. 김기설은 서강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는 길고 긴 외침을 남기고 한 덩이 불꽃이 되어 떨어졌다. 지금으로부터 꼭 23년 전이었다.
유서도 스스로 못 쓰는 바보, 김기설의 짓밟힌 명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