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대필 사건의 진실, 김기설의 외침을 돌려줍니다

23년 전 오늘, 길고 긴 외침을 남긴 채 한 덩이 불꽃이 된 김기설

등록 2014.05.08 17:05수정 2014.05.0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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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꼭 23년 전, 그러니까 1991년 5월 8일 어버이날이었다. 당시 나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있었는데 수감생활 중 얻은 병으로 감옥 밖 병원에서 외부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1시간여에 걸친 치료가 끝난 후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아 잠시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로비에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정오 뉴스가 들려왔다. 시력이 매우 좋지 않은 나는 화면이 안 보여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뉴스를 귀로만 듣던 중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안경 렌즈가 유리로 되어 있어 이것을 깨어 자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교정당국이 안경을 수거해 갔기 때문이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오늘 아침 7시경 서울 마포구 소재 서강대학교 건물 옥상에서 한 남자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인 후 건물 아래로 뛰어 내렸다고 합니다. 신원이 확인된 남자는 재야단체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약칭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로..."

 1991년 5월 8일,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친 뒤 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했다. 사진은 5월 9일 <한겨레> 15면에 실린 현장 모습.
1991년 5월 8일,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친 뒤 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했다. 사진은 5월 9일 <한겨레> 15면에 실린 현장 모습.한겨레PDF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귀에 들려온 그 이름 석 자 '김기설'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그 김기설일까? 나는 수갑과 포승에 묶인 채로 달려가듯 텔레비전을 향해 걸어갔다. 텔레비전 화면에 뜬 사진 속의 그 인물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브라운관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보게 된 그 얼굴은 정말 내가 알던 바로 그 김기설이 맞았다. 순간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숨졌다. 시위 도중 무술 경관으로 구성된 속칭 '백골단'에 의해 쇠파이프로 집단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다. 그래서 이에 분노한 이들이 살인폭력 집단인 노태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목숨으로 저항하던 그때였다. 나는 내가 알던 김기설이 분신했다는 뉴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으로 돌아온 나는 무기한 단식을 선언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 형, 김기설에 대한 미안함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은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내가 있던 농성장으로 찾아온 김기설

내가 김기설을 처음 만난 때는 1991년 3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나와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동료가 분신자살을 기도하면서 촉발된 대학 농성장에 재야쪽 사람들이 지지 방문차 찾아왔을 때였다. 다른 분들은 한두 번 본 사람인데 유독 한 사람만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가 서울에서 내려온 재야 활동가라는 것을 그의 명함을 받고서야 알았다.


농성 상황 설명을 듣고 난 후 방문한 일행은 당일 경찰에 연행된 이들을 면회하겠다며 일어섰다. 그때 낯모르던 그가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서류봉투를 좀 맡아줄 수 없냐고 물었고 나는 알았다며 건네 받아 들었다. 그러자 명함을 주겠다며 자신의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졌으나 끝내 명함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다른 사람 명함 뒷면에 글로 써 드려도 되겠냐"며 물었다. 그러더니 볼펜을 꺼내 쓴 글씨는 이랬다.

'전국 민족민주 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그런 김기설이 왜 분신을 결행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게 된 후 나는 또 많이 울었다. 1991년 5월 7일이었다. 김기설이 분신을 결행하기 하루 전 날, 일단의 사람들은 김기설이 혹시 분신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김기설과 함께 자취방을 쓰던 임아무개씨가 우연히 김기설의 유서를 발견하면서 부터였다. 당일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취방에 들렀는데 방바닥에 흩어진 몇 장의 종이가 임씨의 눈에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하고 들어서 읽어본 후 유서임을 직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순간 당황한 그는 곧바로 김기설과 같은 전민련 관계자에게 전화하여 이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전해들은 사람들이 놀라 '바로 자취방으로 갈 테니 만약 김기설을 보게 되면 그때까지 붙잡아 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 사실을 모르던 김기설이 잠시 후 방으로 들어왔고 임씨는 연락을 받고 온 이들과 함께 김기설을 포장마차로 데리고 가 술을 마시자며 권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잠시 후 사람들은 김기설에게 유서를 들이대며 "이거 유서 아니냐, 왜 이런 잘못된 생각을 한 것이냐, 당장 네 손으로 찢으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김기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순순히 유서를 받아 제 손으로 찢었다. 그러면서 한 말이 이랬다는 것이다. 미안했다고. 자신이 재야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으면서도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민중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고.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당시 산재 사고로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간 원진 레이온 사건과 동우대학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노동자가 산재로 죽어가도, 어린 학생들이 조직폭력배의 폭력과 경찰의 협잡으로 고통 받아 분신하고, 의문사를 당해도 자신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몹시 고통스러웠다며 그는 울었다고 한다. 그러자 김기설의 선배였던 그들이 "그래도 죽는 것은 안 된다, 살아가면서 우리와 함께 끝까지 싸워나가자, 그럼 결국 우리가 이긴다, 힘내라"며 위로했고 김기설 역시 "이젠 생각을 바꿨다, 방금 유서도 내가 찢지 않았냐, 미안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웃으며 여러 술잔을 다시 나눴다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좀 지나가던 그때였다. "잠시 공중전화 좀 쓰고 오겠다"며 김기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따라 나서려 하자 김기설은 "괜찮다, 여자 친구에게 전화 좀 하려는 것이다,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순간을 지금까지도 안타깝게 회상하고 있다. 김기설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좀 뭐해서 주저앉은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는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김기설의 마지막이었다. 잠시 동안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결국 김기설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제야 사람들은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이 들어 정신없이 김기설의 행방을 찾았다고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찾던 김기설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은 약 두어 시간 후인 8일 오전 7시께였다. 김기설은 서강대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는 길고 긴 외침을 남기고 한 덩이 불꽃이 되어 떨어졌다. 지금으로부터 꼭 23년 전이었다.

유서도 스스로 못 쓰는 바보, 김기설의 짓밟힌 명예

'유서대필' 강기훈 23만에 무죄 판결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지난 2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유서대필' 강기훈 23만에 무죄 판결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지난 2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유성호

그런데 일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의 시작이었다. 김기설이 분신할 때 그의 운동권 동료였던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대신 유서를 써 주며 잘 죽으라고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설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당시 검찰 등 공안당국이 써나간 것이다. 처음엔 노태우 독재권력이 위기에 처하니 별 쇼를 다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매일 대문짝만하게 이 검찰발 뉴스를 써나가니 사람들의 입에서 점점 유서 대필이 사실이냐, 아니냐며 엉뚱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불길에 결정적인 기름을 부은 이는 당시 서강대학교 총장이었던 박홍이었다.

박홍은 밑도 끝도 없이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말했고 이 발언은 황당한 상상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된다. 신이 난 것은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매체였다. 보수매체들은 글자체를 언급하며 유서가 대필이니 아니니 하면서 의심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렇게 시작된 지난 23년간의 '유서대필 사건' 진실 공방은 이후 두 사람의 명예를 철저히 짓밟았다. 그중 한명이 유서 대필범으로 억울한 누명을 받고 살아온 강기훈이었다. 그는 이후 조작된 '자살 방조죄'로 실형 3년을 꼬박 살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감옥에서 나오고도 그는 동료에게 죽으라고 유서를 써 준 '세상 천하에 없는' 나쁜 놈으로 살아야 했다. 누군가에게 잘 죽으라고 유서를 써 주는 파렴치범으로 몰려 그가 겪어야 했던 참담한 고통을 무엇으로 설명할까. 결국 그 억울함과 분노로 인해 그는 치명적인 암 환자가 되었다. 그의 건강은 지금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강기훈의 모든 삶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노태우 독재권력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강기훈의 '모든 것을' 철저히 짓밟은 것이다. 누구보다 강기훈이 무죄인 줄 알았던 이들은 당시 대한민국 검찰과 경찰, 그리고 청와대 권력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살고자 강기훈을 유서를 대필하는 파렴치범으로 만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서강대 메리홀에서 김기설씨 분신자살에 대해 기자 및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박홍 서강대총장. 1991.5.8
서강대 메리홀에서 김기설씨 분신자살에 대해 기자 및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박홍 서강대총장. 1991.5.8연합뉴스

그리고 또 다른 진짜 피해자는 바로 김기설이었다. 강기훈을 파렴치범으로 만들었다면 당시 저들은 김기설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천하의 바보'로 만들었다. 분신 자결하면서 스스로 유서 한 장 쓸 능력도 없어 누군가에게 유서를 써 달라며 부탁한 바보가 바로 지난 23년간의 김기설이었다.

그래서 김기설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그 유서는 김기설의 외침으로 남지 못했다. 그렇기에 누구도 김기설의 유서를 제대로 읽어 본 사람이 없었다. 그저 그 종이에 써져 있는 글씨가 강기훈의 필체와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만 공박하고 싸우고 다툴 뿐이었다. 그래서 유서의 글씨를 한 자 한 자 뜯어서 볼 뿐 그 글에서 무엇을 그토록 절절하게 말하려 한 것인지 누구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유서는 오직 '유서대필사건의 증거자료'로 세상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014년 2월 14일. 이 사건의 진실을 잊지 않았던 이들의 투쟁 끝에 '정의의 일부'를 되찾았다. 서울고법 형사10부에서 열린 이 사건 재심판결에서 주심이었던 권기훈 부장 판사가 "피고 강기훈의 자살 방조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는 선고를 내린 것이다. 긴장 속에 법정을 가득 채운 변호인과 방청객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곧이어 법정 가득 환호와 박수 소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무죄를 선고받은 강기훈의 표정에는 웃음이 없었다고 한다.

김기설 형의 23주기 기일을 '다시' 추모합니다

김기설의 유서 전문 누구도 이 유서를 김기설의 유서로 보지 않았다. 그저 자음과 모음으로 뜯어 볼 뿐 김기설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려 하지 않았다. 김기설의 23주기를 추모일을 맞아 나는 많은 이들이 이 유서를 읽어 줬으면 한다. 김기설이 말한 아프고 힘든 세상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기설의 유서 전문누구도 이 유서를 김기설의 유서로 보지 않았다. 그저 자음과 모음으로 뜯어 볼 뿐 김기설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려 하지 않았다. 김기설의 23주기를 추모일을 맞아 나는 많은 이들이 이 유서를 읽어 줬으면 한다. 김기설이 말한 아프고 힘든 세상은 여전히 계속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 진실은 찾았지만 법정에 앉아 있던 강기훈도 웃을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저 세상에 있었던 김기설 역시 웃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 유서는 김기설의 것이었고 강기훈은 유서를 대신 써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식을 저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텐데... 상식을 되찾는데 필요했던 23년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세월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김기설의 23주기 추모 기일을 맞아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외침을 온전히 그 진짜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자 한다.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 노태우가 김기설에게서 빼앗아 강기훈 손에 억지로 쥐어준,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그 유서를 이제 김기설에게 정당하게 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틀어막아 버린 김기설의 그 외침을 사람들이 들어준다면 김기설 형 역시 한 번쯤은 웃어주지 않을까.

단순하게 변혁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맑은 현실과는 다르게, 슬프게, 아프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 속에 얻은 결론이겠지요.

노태우 정권은 퇴진해야 합니다. 민자당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슬픔과 아픔만을 안겨주는 지금의 정권은 꼭 타도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죽음과 아픔을 안겨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죄악스러운 행위만을 일삼아온 노태우 정권을 향해 전면전을 선포하고 민중권력 쟁취를 위한 행진을 위해 모두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 김기설 -

김기설 형. 잊지 않겠습니다. 형의 23주기 기일을 '다시' 추모합니다.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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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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