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역대학생교육대책위 소속 학생들이 지난 1월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대통령의 반값등록금 공약 이행과 대학재정의 투명한 심사의결을 위해 민주적 등록금심의위원회 구성을 촉구하고 있다.
유성호
한 시립대의 경우, 지방자치단체장이 부임한 뒤 단 보름 만에 500만 원에 가까웠던 등록금을 절반으로 낮춘 일까지 있었습니다. 올해로 3년째 절반 등록금제를 시행하고 있는 그 학교와 지역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지난 2월 한국방송(KBS) 보도에 따르면, 그 학교에 다니던 한 학생은 3개나 하던 아르바이트를 모두 그만 두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과차석을 차지해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반값 등록금의 선효과는 단지 학생 개인의 혜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정책이 시행된 이후 학자금 대출자는 매년 크게 줄고 있고, 학생들은 여분으로 얻은 시간과 금전적 여유를 지역주민에게 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앞의 뉴스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 교육이나 중고등학생 과외 등 지역 주민들을 위한 학생들의 봉사활동은 배 이상 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반값 등록금 혜택을 입은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혜택을 많이 받았으니까 사회에 돌려드리자는 생각이고요. 봉사 자체가 기쁜 일이어서 하게 됐습니다."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중앙정치'의 경우,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이념적 갈등으로 참신한 정책을 도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방자치는 이 일을 비교적 수월하게 해 낼 수 있습니다. 물론 유권자가 관심을 갖고 선거에 참여할 때만 가능한 일이겠지요.
한국사회는 이런 몰골이 아니었습니다제가 모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국사회가 이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훨씬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웠지요.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반대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입학했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교정 곳곳에 최루탄 파편과 깨진 병이 널려있고, 나무와 나무,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는 험한 구호 쓰인 현수막이 절규하듯 나부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벽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빽빽이 붙어 있던 대자보였습니다. 그때 보며 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이랬습니다.
"내가 빨갱이 학교에 들어왔구나."왜 학교에서 저런 이상한 글들을 떼지 않고 내버려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보낼 4년이 끔찍했습니다. 그 후 20여년이 흘러, 저는 대학에서 그때 제 나이뻘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학생과 교수, 한국과 미국을 두루 경험한 탓에,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한국은 과거보다 훨씬 끔찍한 곳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학교에서 대자보를 떼지 않은 이유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대자보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고 (자학성향이 아닌 한 그 글을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글자체나 배치의 미학적 가치를 인정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대자보에 손을 댔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학교가 학생들을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었던 것이지요.
제가 졸업할 때까지도 캠퍼스의 '알싸한' 최루탄 기운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학생활은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았습니다. 등록금은 쌌고, 모두가 하나 이상의 취미 동호회에 가입했으며, (저 빼고) 누구나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저는 '모범생'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친구 꾐에 빠져 기말고사를 빼먹고 놀러갔다가 졸업 때 애를 먹기도 했습니다(그 친구는 지금까지 제게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졸업 후 별 문제 없이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마지막 학기에 취업 원서를 딱 두 개 냈고, 그중 하나에 취직이 되어 졸업한 뒤 바로 출근할 수 있었습니다. (예상하실 수 있듯) 학교성적은 시원찮았고, '해외연수'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으며, 그 흔한 토익이나 토플 시험조차 치른 일이 없었습니다. 내세울 '스펙' 같은 게 없었던 건 당연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에는 그런 말조차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공무원은 따분하다는 이유로 인기가 없었고, 지금 대다수의 대기업이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직능적성검사' 같은 것도 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취직했고, 마음에 안 들면 그만 두고 다른 곳에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저 역시 회사를 한 해 다니다 그만 두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제 평생 가장 잘 한 결정이었습니다만, 지금처럼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였다면 직장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겁니다.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사회가 가능하다는 점을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짧은 과거에 이런 사회가 존재했다면, 짧은 미래에도 이런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은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