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웨이 커플> 한 장면.
<서브웨이 커플>
나는 지하철 4호선 족이다. 신입사원 시절을 제외하고는 4호선을 타고 출근하는 지역만을 고집해 살았으니, 4호선으로 출근한 것이 17년이 되어간다. 예전 근무 회사의 사무실이 을지로에 있어서 명동역에서 내려서 명동 한복판을 지나오곤 했는데, 여름 장마와 겨울 추위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17년간 4호선을 타고 출·퇴근하면서 이러저러한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유독 기억나는 사연이 있다. 그 사연에 그분이 있다. 2009년 정도의 일로 기억되는데, 아침 출근 전에 회사 근처의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기 위해 거의 매일 첫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첫차의 장점은 항상 앉아서 올 수 있다는 점이었고, 그것도 가장 편한 자세로 잘 수 있는 문 옆 기둥이 있는 자리를 잡아서 올 수 있었다. 참고로 평촌역의 첫차 시간은 5시 24분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매일 아침 첫차 같은 칸에 타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공교롭게도 내리는 역이 명동역으로 같았다. 보이기로는 이모뻘 쯤 될 듯한데, 첫차를 타는 것으로 보아 남들이 출근하기 전에 출근해 일하는 직업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매일 첫차를 같은 칸에 타다 보니 은근한 친밀감 같은 것도 생기고, 아주머니가 첫차를 타지 않는 날은 괜히 걱정도 되기도 했는데, 아마 그 아주머니도 내가 전날 술로 첫차를 타지 못했을 때 같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첫차에서 만난 아주머니와 친해지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늘 피곤하고, 그래서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으면 무조건 잠을 보충하기 위해 의무감으로 자기 마련이다. 그런데 도시생활도 적응이 되어서인지, 처음 서울에 와서 사람들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기 내릴 역에서 딱딱 내리는 것이 경이롭기만 했는데, 어느덧 내가 그런 도시인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는데, 그렇더라도 완벽하게 도시인이 되지는 못했는지 가끔은 여러 역을 지나치곤 했다. 한 번은 명동역이 아닌 혜화역에 가서 깬 적도 있었다. 그날도 뭐가 그리 피곤했던지 자리에 앉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아니고, 정말깊이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어디선가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봐요. 명동인데, 내려야지!""네, 네, 아."얼떨결에 후다닥 뛰어내려서보니 아주머니는 벌써 큰 배낭을 메고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계셨다. 그 후로도 아주머니와의 첫차 인연은 계속되었다. 아주머니는 어김없이 첫차를 타셨고, 나 또한 어지간하면 첫차를 탔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아주머니는 잠에 취한 나를 여러 번 깨워서 명동역에서 제대로 내리게 도와주셨다.
회사를 이직하기 전까지 아주머니와 명동역까지의 동행은 계속되었는데, 2011년에 이직으로 더 이상 첫차를 타고 명동역까지 갈일이 없어져서 아주머니와의 첫차 인연은 계속되지 못했다. 아마도 그 아주머니께서는 '그 양반 요즘 왜 안 타는 거야?'라고 조금 궁금해 하실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생판 모르는 분이었지만, 지쳐서 졸고 있는 직장인이 자식같아서 안쓰러운 마음이 드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아주머니의 따뜻한 배려에는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솔직하게 하는 말이지만, 첫차에 아주머니가 타고 계셔서 명동역에서 깰 걱정 안하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새벽의 첫차에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느낌, 정말이지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다.
아주머니는 오늘도 4호선 첫차를 타셨을까? 혹시 요즘도 나 같은 4호선 첫차족이 있어서 그 아주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4호선을 타면 지금도 문득 문득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아주머니, 여전히 그때처럼 건강하신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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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명동인데 내려야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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