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겨울에 갇힌, 한 남자가 내놓은 건...

[서평] 이수호의 세 번째 시집 <겨울나기>

등록 2014.06.21 16:37수정 2014.06.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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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수호 선생  교사와 민주노총 위원장 등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전직 교사이자 시인이다.

이수호 선생 교사와 민주노총 위원장 등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해 온 전직 교사이자 시인이다. ⓒ 이수호


이수호 선생은 전직 교사며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전제교육 흔적이 많이 남아 있던 시절, 척박했던 교육현장의 교사로, 또 전교조의 위원장으로의 삶을 살았던 이수호 선생이 자신의 세 번째 시집 <겨울나기>를 출간했다.

시집 제목이 말해주듯 그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선 반드시 겪어야 하는 혹독한 겨울과 같은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을 잘 담았다. 특히 용산참사와 쌍용차, 4대강 사업, 전교조 법외화, 세모녀의 비극, 장애인 등급제로 죽어간 송국현씨 사례, 세월호 참사 등을 겪으며 느낀 아픔과 반성, 자기성찰 등을 절박한 언어로 담아냈다.


나는 선생을 두어 달 동안 무척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수호 선생은 근엄한 외모와는 다르게 무척 따뜻하고 눈물이 많은 분이었다. 선생은 한마디로 '인동초' 같은 분이다. 시심 가득한 시인인 선생을 우리 사회는 시대의 겨울 속에 가두고  끝없이 인내를 요구했다.

야생화인 인동초는 이름처럼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추위를 견디다 봄에 꽃을 피운다. 그래서 인동초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인동초의 꽃말은 부성애, 우애, 헌신적인 사랑, 인내다. 이수호 선생의 생애 대부분은 인동초의 겨울나기와 같았다. 그 겨울을 메마르지 않게 견디게 한 것은 아마도 선생이 지닌 서정성과 시심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겨울날 같은 시대를  견디며 인동초 향기 같은 시를 써내려 갔다.

선생의 세 번째 시집 <겨울나기>에는 혹독한 시대의 찬 서리와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디어 낸  인내의 시간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눈물과 헌신이 그대로  담겨 있다.

<겨울나기>는 크게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 '그대에게'는 시인 자신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시로 엮었다.

묽은 흰죽 한 숟갈을
입 속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한다
결국 인간이란 죽 한 숟갈이라는 걸
열나흘 단식 후 처음 뜨는 이 한 숟갈
이 한 숟갈이 모든 세포들을 다시 일깨우고
그래서 생은 지탱되고 삶은 유지된다는 것을
복식을 시작하며 깨닫는다 
- 흰죽 한숟갈 일부


a 겨울나기  시인이자 전직 교사인 이수호 선생의 세 번째 시집이다.

겨울나기 시인이자 전직 교사인 이수호 선생의 세 번째 시집이다. ⓒ 삼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만들었을 때 사무처장으로 감옥에 가야 했던 선생은 이후 전교조위원장, 민주노총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 교육운동과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시대의 겨울을 견디며 봄을 기다렸다.

2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는  쌍용차 해고자, 용산 유가족, 세 모녀, 장애인 송국현의 죽음과 세월호 등 사회 복지와 안전 사각지대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시대적 아픔을 담아냈다.


추운 겨울이 다 가고
3월이 왔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깨끗한 하얀 봉투에
70만 원 넣어놓고
단독주택 지하 단칸방에서
세 줄 남기고
세 모녀 갔다
가난 없는 곳으로
절망 없는 곳으로

봄비 오겠다는 예보가
끄지 못한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세 모녀  일부

그 큰 배가 흔들리며 한쪽으로 기우는데
방송은 움직이지 맑고 가만있어라만
반복하고 있었다

(중략)

오늘도 여기저기서
가만있어라 한다

용산참사 유족들도 가만있어라
쌍차 불법 정리해고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강정마을 주민들도 가만있어라
밀양 송전탑 주민들도 가만있어라
현대차 불법파견 비정규직 오동자도 가만있어라
유성기업 노조 파괴당한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철도노조 부당해고 강제전보당한 노동자도 가만있어라
농토에 쌀값까지 뺏긴 농부도 가만있어라
재개발에 밀려난 철거민도 가만있어라
부양의무제 등급제에 불타 죽는 장애인도 가만있어라
최저임금이라도 제대로 달라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도 가만있어라
연수생이란 이름으로 날밤을 세우는 고등학생도 가만있어라
노동자의 이름도 못 쓰게 하는 특수고용노동자들도 가만있어라
아무런 안전대책도 없는 수많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도 가만있어라
가난의 고통에 몰려 번개탄을 피우는 세 모녀도 가만있어라
가만잇어라 가만있어라
가만있어라

이제는
우리 학교가 자울과 자주를 가르치고
우리 사회가 의심과 저항을 가르쳐야 한다
나라가 나라의 몫을 못하는 나라에서
국민이 스스로 살아남게 하기 위해
이제는 가만있을 수가 없다
아니 가만있지 않겠다
- 가만있어라 일부

3부 '통도사 가는 길'과 4부 '겨울나기'는 지난 총선 때 진보교육감 후보로 나섰던 선생이 고배의 쓴잔을 마시고 난 뒤 자기반성과 성찰을 하며 쓴 시를 모은 것이다.

시의 행간마다 선생이 어떻게 그 긴 겨울을 인내와 헌신으로 감내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선생이 지닌 미덕이, '인동초' 같은 인내와 헌신 그리고 겸손이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된다.

겨울을 나기 위해
나무는 옷을 벗고
풀들은 씨알을 준비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나비는 번데기가 되고
개구리는 얼음장 밑
돌 틈에 웅크리고
곰들도 바위 동굴에서
긴 잠을 청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철새는 스스로 뼛속을 비우고
상승기류를 몸에 싣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자기의 겨울이 있다
나는 내 겨울을 나기 위해
오늘도 새벽길을 나선다

- 겨울나기 전문

6·4 지방선거 결과 13개 지역에서 진보교육감이 선출되었다.  특히 인지도  4%대였던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당선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불과 1년여 전, 이수호 진보단일 교육감 후보는 전교조 프레임과 종북몰이의 벽을 넘지 못하고 고배의 쓴 잔을 마셨기 때문에 기쁨은 더 크다. 이번 진보 교육감 대거 당선은 스물다섯 해 동안 시대의 칼바람을 견디어 온 전교조 선생님들의 헌신과 사람, 인내의 쓴 시간이 가져다 준 열매다.

그런데 손에 손을 잡고 아이들의 행복과 미래와 안전만을 생각하며 달려가야 할 교사들에게 정권은 다시 한 번 철퇴를 내렸다. 아직도 인동초처럼 견뎌내야 할 시간이 남은 것일까. 자기 몫의 겨울을 나기 위해 새벽길을 나서는 선생의 인동초 같은 오래 참음은 또 하나의 열매가 될 것이다. 그러나 겨울나기의 시간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겨울나기/이수호시집/ 삼인/12,000원

겨울나기

이수호 지음,
삼인, 2014


#이수호시집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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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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