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북한산 산행 중 자주 볼 수 있는 큰뱀무 꽃
김현자
여하간 언제든 한번은 산에서의 부적절한 만남에 대해 써보고 싶었던지라 '산행 중 잠깐 스쳤을 뿐인데 인연이네' 운운하며 남다른 인연을 원하는 남자의 제의에 선뜻 대꾸해줬다.
"실은 저도 좀 심심했는데 그럼 그럴까요?"흐린 듯 은근 찌는 날이었다. 남자는 미리 얼려왔는지 차가운 캔 커피 하나와 함께 올라오는 길에 산 것이라며 살구를 내밀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산행 친구가 되었다. 그동안 골프를 친다고 이제 막 산행을 시작해 길을 잘 모른다는 그 남자의 가이드가 되어 3시간가량 함께 산행했다.
정상까지 마저 올라갔다가 하산까지, 함께 산행하는 동안 남자는 해외여행 이야기를 비롯해 어디에 땅이 있다는 등을 과시하듯 말했다.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언제부턴가 나보다 최소한 5살은 더 먹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 남자는 은연 중 말을 놓기 시작했다.
북한산성 매표소로 하산했을 때는 3시 반 무렵.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하산이 거의 끝날 무렵 남자가 제안했다. 덕분에 산행이 즐거웠으니 분위기 좋은 집에서 커피 한잔 사겠노라고. 이때쯤 남자는 가까이 붙어 걸으며 어깨에 손을 얹거나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내 배낭을 팔로 감싸 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피하게 하는 등 가벼운 스킨십을 시도했다. 아웃도어 매장 앞을 지나면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수입브랜드 아웃도어를 얼마에 샀다는 등과 같은 이야기도 했다.
"이제 겨우 4시 좀 넘었어. 아직 한낮이나 다름없는데 드라이브라도 갈까요? 아직 저녁 먹긴 이른데, 교외로 나가 분위기 좋은 집에서 저녁도 먹고 말이야. 가자!" 카페에서 30분쯤 있었나. 남자는 이런 제안을 했다. 작정하긴 했지만 남자의 차를 타고 어디로 이동한다는 것에 왈칵 겁이 나 우선 대충 대답해 놓고 배낭을 그대로 두고 화장실로 갔다. 그리고 딸에게 재빨리 '5분 후쯤 엄마에게 전화를 꼭 해'라고 연거푸 메시지를 보낸 후 진동모드에서 가장 큰 음량으로 바꿨다.
남자와 카페를 나설 무렵 딸이 전화를 해왔고 난 딸에게 '부장님'이라 부르며 "취재 했는데 기사가 잘 안 써져 기분 전환하려고 산에 왔다. 빨리 써서 어떻게든지 새벽에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며 다소 큰 소리로 말했다. 그간 산에서 남자들이 수작을 걸 때마다 '기자'라는 것을 은연 중 밝히면 흑심이 있는 남자들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경험상 흑심이 많은 남자들일수록 세상 물정에 밝은, 즉 아는 것 많은 여자들을 꺼린다.
남자는 "가야할 곳이 있었는데 깜박했다"는 말을 한 후 어정쩡한 인사를 하고는 가버렸다. 남자가 간 후 가장 가까운 아웃도어 매장으로 가 등산바지 두 개를 사며 매장 직원에게 요즘 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여자 일행이 건넨 술 한 잔에 정신 잃어... 깨어보니 다 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