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국수 한 그릇
ko.wikipedia.org
자식을 두고 우스갯소리로 딸만 둘이면 금메달, 아들만 둘이면 '목매달'이라는 말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딸도 딸 나름이야." 나만큼 무심하고 무뚝뚝한 딸이 있을까? 결혼을 하고 큰애를 낳을 무렵 두 남동생 중 큰 동생도 결혼을 했다. 맏딸을 결혼시키고 2년이 채 되지 않아 아들까지 장가를 보낸 후에 헛헛했을 울 엄마. 결혼 전에는 저녁마다 내 방에 들어오셔서 "니 아빠가~" 하고 푸념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서는 가끔 전화로 속풀이를 하셨다.
"아줌마, 안 죽고 살아 있네! 손가락은 멀쩡허다냐?"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는 나를 놀리듯 아줌마라고 불렀다. 엄마는 갓 시집간 딸이 시집살이라도 할까 맘 놓고 딸네 집에 드나들지 못해 속상한데, 그 속도 몰라주고 전화 한 통 없는 딸을 나무라듯 손가락 타령을 하셨다. 얘기는 으레 "니 아빠가~"로 이어졌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 술 한잔 했구나" 하며 무심하게 전화를 받곤 서둘러 끊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은 혀가 꼬여, 전화를 받자마자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엄마, 술 마셨어?""그래! 일 끝나고 아줌마들이랑 한잔 했다. 왜, 나는 술 마시면 안 된다냐?"'아, 진짜!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엄마는 인테리어 현장에서 페인트 기술자로 일하신다.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을 하면서 가끔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씩 하는데, 그날은 좀 과하다 싶었다. 순간 짜증이 밀려왔지만 전화를 끊을 수 없어 건성으로 엄마의 타박을 듣고 있었다. 전화 한 통 안 하는 매정한 딸년(나)부터 시작해 아빠 욕까지 실컷 토해내던 엄마는 결국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해버렸다.
"니 아빠가 어떤 사람인 줄 아냐? 널 낳자마자 딸을 낳았다고 노발대발 하더니 산에 내다버린다고 들고 나가더라. 정말로 너를 내다버릴 것 같아 쫓아가 뺏어왔다. 니 아빠가 그런 사람이어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져 그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만 멍하니 듣고 있었다. 아무리 첫 자식이 아들이기를 바랐다지만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러고 보니 아빠는 늘 말끝마다 "기집애가!"라는 말을 했다. 아빠는 고모가 하나에 걸걸한 삼촌들만 있는 7남매 중 장남인데 첫 자식이 아들이 아닌 것이 그리도 화를 낼 일이었을까? 장남이어서? 조선시대 종가집도 아닌데 그깟 장남이 뭐라고…. '엄마… 그 말은 하지 말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래서 나를 대학 못 보낸다고 했을까?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진학상담을 하러 학교에 온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선생님한테, 아들도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했는데 딸을 어떻게 공부시키느냐며 상고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왜? 왜 내가 상고를 가야 해?" "이 학교가 집에서 가까워 걸어다닐 수도 있고, 이름 있고 좋은 학교랜다." "싫어, 나 대학 가야 된단 말이야. 나보다 더 공부 못하는 애들도 다 인문계 가는데 왜 내가 상고를 가! 나 그 학교 안 갈 거야!"그렇게 교무실에서 한 시간을 울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때도 엄마 땜에 선생님이 되려던 꿈을 접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왜 또….' 상처를 주는 엄마만 보였고 나만 아팠다. 왜 상처 주는 엄마만 보이고 아픈 나만 억울하게 느꼈을까?
"딸 낳았다고 버린다고 들고 나가더라... 니 아빠가 그런 사람이야" 두 아이를 낳고 어느새 큰애가 중학생이 되고 보니 이제야 그때의 엄마가 보인다. 엄마는 혼자 아프게 '오춘기'를 앓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후에 아빠가 사우디에 가셨다. 197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많은 아빠들이 사우디 건설현장으로 파견근무를 나갔는데, 아빠도 큰돈을 벌 요량으로 가셨다고 한다.
아빠는 목돈을 1년에 두어 번 보내주셨고 그렇게 보내온 돈은 외상값 갚기가 무섭게 바닥이 나곤 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엄마는 갓난쟁이를 들쳐업고 길에서 채소라도 팔아야 했다. 몇 년을 남편 없이 삼 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엄마의 손에는 부업거리가 끊이질 않았다. 조화를 조립하는 일, 목장갑 손끝을 마무리 하는 일, 인형 눈알 붙이는 일, 바구니 만드는 일….
엄마는 품삯을 받으면 라면 한 박스를 사다 놓았다. 맛있는 것 많이 못해주고 과자 한 봉지 제대로 사주지 못하는 것이 안쓰러워, 삼남매 기죽지 말고 라면이라도 실컷 먹으라고 하셨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은 친구를 불러 자랑삼아 생 라면을 부숴 먹었고, 라면 한 박스는 일주일도 채 가지 않았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일을 하면서 늘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바다가 소주라면, 바다가 소주라면, 해 뜨는 부두에서 홀짝홀짝 마셨을 것을~."엄마가 개사(?)한 애창곡이다. 어린 나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노랫말이 정말 '소주'인 줄 알았다. 어린 내가 아빠를 찾을라치면 월남전 사진 속 아빠를 보여주었고, 노래 불러서 아빠에게 보내자며 노래를 녹음해서 우편으로 보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고단함을 노래로 이겨내셨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