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전교조 위원장 "무능한 정부에 분보하지 않을 수 없다"김정훈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전교조 사무실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2차 교사선언 기자회견'에 회견문을 읽고 있다.
유성호
왠지 불편한 '이런 전교조, 저런 전교조'전교조는 변해야 산다고도 하고 변하더라도 이렇게 저렇게 변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전교조가 변화를 모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세상 만물은 무상(無常)하게 변한다. 전교조 25년 세월 동안 우리 사회 전체가 엄청나게 변했다. 학생들도 변했다. 전교조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만 말해 보자. 결성 당시 전교조가 학교 현장에서 부딪힌 가장 힘든 벽은 비교육적 악습이었다. 교장을 정점으로 교육 관료들은 비민주적 전횡을 일삼았다. 이들은 촌지를 받고 부교재 채택료를 챙기는 등 돈과 관련해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다. 전교조가 마주한 또 다른 철벽은 교육 모리배들의 오랜 부정부패였다. 상당수 사립학교의 경우 상상을 불허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학교를 운영해왔다.
이 모든 악·폐습들은 학생들을 답답함과 절망, 고통 속으로 몰아갔다. 학교에서 행복하게 공부해야할 학생들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그래서 전교조 교사들은 나날이 그 벽들과 싸워야하는 고난을 감수했다.
그러는 동안 전교조는 '불법'에서 '합법'으로, 최근에는 다시 '법외' 노조로 외적 조건의 변화를 겪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기승을 부린 전교조 죽이기의 한 귀결이다. 그러나 전교조가 지난 25년을 싸우며 버티는 동안, 철옹성과도 같던 그 벽들도 시나브로 무너지거나 약해지거나 변해갔다. 전교조의 변화도 필연적이었다. 그런 벽들 때문에 전교조도, 참교육도 탄생한 것이니까.
10년의 정치적 투쟁 끝에 합법화가 된 후 전교조 교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한 걸음 더 학교 현장 속으로!'에 동의했다. 그래야 마땅한 변화였다. 변화라기보다는 교사 본래의 자리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합법화 후 지난 15년 동안, 전교조는 결성 당시처럼 국민과 학생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았는가? 명실상부한 교육 개혁의 견인차요, 주체 세력으로 더욱 성장했는가? 나의 답은 '아니다'이다. 나부터가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다.
그러나 이범씨의 칼럼은 불편했다. 그는 전교조 활동가를 '주류-비주류'로 나누었다. 이범씨는 칼럼을 통해 '쟤들이 잘못 했어요'라며 남 탓을 하는 주류의 길이 아니라 '학교 개혁'과 '수업개혁'을 실천해 온 비주류의 길을 감으로써만 전교조가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 당연해 보이는 말에 나는 왜 불편했을까?
누가 '주류'고 누가 '비주류'인가나는 내일 모레 예순을 맞는다. 4년째 재직 학교의 전교조 분회장을 맡고 있다. 14명 교사가 조합원인데, 좀 열심히 '활동'하는 조합원은 서넛이다. 대통령에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묻는 1차 교사 선언에는 14명 모두 참여했다. 법외 노조 판결 이후 투쟁이랄 것도 없는 '조퇴'는 아무도 안 했다. 그런가 하면 한 30대 말 조합원은 혁신학교에 대비해 진작부터 '새 학교'라는 교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한 40대 중반의 조합원은 전교조,비전교조 할 것 없이 7명의 교사가 모인 '독서 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지난 봄 서울로 '투쟁'하러 간 사람은 분회장인 나 혼자였다. 하지만 합법 노조의 지위를 잃음으로써 필요하게 된 '투쟁 기금'을 모으기 위해 조합원 모두가 상당한 정도의 돈을 냈다.
여기에 무슨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는가? 전교조 집행부가 소위 '강성'이든 '연성'이 든, '주류'가 되든 '비주류'가 되든 상관없다. 그냥 일선학교 전교조 조합원들의 오랜 일상적 삶의 모습이다.
사르트르는 알제리의 독립 운동 자금을 운반하다 프랑스 경찰에 체포됐다. 한 장관이 그의 매국 행위를 두고 드골 대통령에게 처벌 여부를 물었다. 드골 대통령은 "그도 프랑스야!"라고 일갈했다. 전교조 내 정파 간의 소모적인 논쟁이 다소 문제가 될 때도 있다. 그래도 전교조는 서로 "그도 전교조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교조의 대다수 조합원들은 법외노조라는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70%에 육박하는 이 조합원들에게 주류,비주류냐 묻는 것은 어리석다.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은 이범씨의 또 다른 말은 '쟤들이 잘못 했어요'다. 이 비판에는 '주류'에 대한 비아냥이 섞여 있다. 불의한 역대 정치권력의 전교조 죽이기에 맞서, 최소한의 대응 투쟁을 한 것이 잘못됐나. 이조차도 남의 탓만 하느라 정작 '교사의 윤리적 실천'을 소홀히 한 태도의 소산인가. 전교조의 '투쟁'이라고 해 봐야 평화적 집회나 연대 서명을 통한 선언서 발표 정도다. 조퇴나 연가를 사용하는 신사적인 '투쟁'이 고작이다. 교사로서 윤리적 책무감이 없다면 어떻게 불이익을 감수하고 선언에 참여할까? 편히 여흥을 즐길 수 있는 휴일까지 굳이 반납하며 어떻게 거리로 나설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는 이 참담한 시대를 적나라하고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교사의 윤리적 실천'은 진정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예수나 붓다 같은 '인류의 교사'에게 묻고 싶다. '진실과 불복종의 교육'이 무엇인지 고구하게 만드는 조너선 코졸 같은 선생님에게도 묻고 싶다. 혹은 김구 선생이나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에게도 새삼 물어보고 싶다. 그 답은 쉽지도 않고, 하나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