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활동 방해말라"... 단식하며 외친 구호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37]4. 너의 분신, 우리들의 터전

등록 2014.08.11 11:32수정 2014.08.1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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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위대한 어머니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김봉준

이소선은 탈진한 상태에서 경찰서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서 엉덩이 하나가 들썩들썩 거렸다. 이소선은 어둠을 가르고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경찰 하나가 전태일 친구의 머리를 다리 사이에 끼워놓고 입을 막은 채 조이고 있는 것이다.


전태일 친구는 입을 열지도 못하고 "음음"거리며 신음만 내뱉고 있었다. 이소선은 어둠 속에서도 그 광경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나쁜 놈들이 있나. 이소선은 허리를 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경찰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경찰은 '아악!'하고 비영을 지르더니 전태일 친구를 조르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그때서야 전태일 친구는 목을 매만지며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중부경찰서에 연행된 뒤에도 이소선과 노조 간부들은 굴복하지 않고 구호를 외쳤다.

"노조활동 방해 말라!"
"근로조건 개선하라!"

이들은 보호실이나 유치장도 아닌, 문만 닫으면 깜깜한 방에 갇혇다. 경찰은 끼니때가 되면 이들에게 밥을 시켜다주었다.

"절대로 먹지 말라! 우리가 차라리 기름을 덮어쓰고 죽는 것보다 여기서 죽으면 저놈들 책임이 될 테니깐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


이소선은 간부들에게 "우리 모두 단식해서 죽자"고 소리쳤다. 경찰이 날라다준 밥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경찰은 이들이 밥을 먹든 안 먹든 끼니때면 밥을 가져왔다. 쟁반이 들어오면 이들은 계속해서 쌓아두었다. 그 동안 워낙 굶주려서 밥을 옆에 놔두고 안 먹는다는 것은 굉장히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이들은 단식을 하면서 3일을 버텼다. 어떤 간부는 똥물을 쌀 정도였다. 곳곳에서 토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영희는 이들과 달리 몇 차례 조사를 받았다.


"배후조종을 하지 않았느냐?"
"죽으라고 석유를 사주지 않았느냐?"

경찰은 이영희를 추궁했다.

며칠 뒤 이영희의 형님 되는 분이 이영희를 면회했다. 이소선은 그 형님 되는 분을 만났다.

"죄송합니다. 이 선생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공연히 우리 때문에 이영희 선생이 생고생을 하는군요. 참 죄송합니다."

이소선은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려운 때일수록 협심해서 잘 견뎌야지요.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동생 걱정일랑 마시고."

이영희의 형님은 동생에 대해서는 걱정하는 눈빛도 없이 이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격려의 말씀을 남기시고 돌아갔다.

'세상에 저렇게 훌륭한 형도 있을까.'

이소선은 뒤돌아가는 그분을 보고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영희는 이 사건 이후에도 청계노조와 노동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대학원 졸업 이후에는 노총에도 관계하고 크리스찬 아카데미에도 근무하면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조합 간부들이 노동법을 아직 잘 모르는데다 탄압이 가중되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많은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노조간부들은 무슨 일을 하다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싸움을 자주했다. 그럴 때면 이영희는 돈을 가져와서 간부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마련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간부들을 부드럽게 결집시켜주었다.

한번은 간부들이 어떻게 심하게 싸우는지 이소선으로서는 도저히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서로 엉겨 붙어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가고 있었다. 노조간부들은 한창 젊은 나이 때문인지 걸핏하면 싸움을 했다. 하지만 한바탕 싸우고 나서 일단 화해를 하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금세 풀어졌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정도가 너무 심해 어떻게 해볼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소선은 고민을 하다가 저녁에 이영희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다음날 이영희는 사무실에 오더니 간부들을 종로 5가에 있는 홍어 횟집으로 데리고 갔다. 방을 잡고 자리에 앉자마자 간부들은 어제 일로 또 싸우기 시작했다. 참 지긋지긋하게도 싸운다. 이소선이 가만히 들어보니 "누가 이 선생님한테 일러바쳤느냐"는 것으로 싸우고 있었다. 서로 상대방을 의심해가며 주먹질까지 오갈 판이었다.

"이 선생님! 바라만 보고 있지 말고 어서 말려보세요."

이소선은 걱정이 되어 이영희에게 도움을 청했다.

"가만 내버려두세요. 한바탕 신나게 싸우게. 하루 이틀 싸운 것도 아닌데, 음식 값이야 어차피 낼 것이고 그릇 값만 더 주면 될 테니까."

이영희는 팔짱을 끼고 속 편하게 간부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음식을 담은 그릇이 날아가고 주먹질이 또 왔다 갔다 했다. 음식점 안이 난리가 났다. 종업원들이 오고 주인이 달려왔다.

"이 선생님, 어서 말리세요. 이러다 뭔 일 나겠어요."

이소선은 조바심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버려둬요. 실컷 싸우고 나면 그때는 슬슬 말리지요."

이영희는 여전히 천하태평이었다. 이소선이 식당주인을 겨우 달래서 보내고 보니 술상이 엉망이 되었다. 싸움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 다들 잘 싸웠는가?"

이영희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이 아쉬운 표정으로 웃었다. 간부들은 서로 노려보며 아직까지 씩씩거리고 있다.

"이 방에 있는 것은 나중에 계산하기로 하고 저 옆방에다 새로 한상 차려주시오."

이영희는 종업원을 부르더니 점잖게 주문했다.

"아니,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또 상을 차리라고요?"

종업원들은 어이가 없는지 화부터 냈다. 밥과 술을 먹으러 왔다가 상을 뒤엎으며 싸움만 했으니 화가 날만도 할 것이었다.

"미안해요. 여기 것은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테니, 말한 대로 다시 상을 차려주시오."

이영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자 간부들이 미안한지 슬금슬금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한 사람도 나가면 안 돼! 그렇게 싸우고 어딜 내빼려고 그래!"

이소선은 꽁무니를 빼려는 간부들에게 소리쳤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기니 다시 번듯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들 술상을 마주하고 빙 둘러 앉았다. 이영희는 간부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주었다.

"이 사람들아, 태일이가 오죽했으면 죽었겠는가? 여러분들은 살아 있으니까 이 정도 어려움이 있다 해도 극복해나가면서 잘 해야지 태일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아?"

이영희가 침착하게 타이르자 간부들은 서로 오해했다면서 악수를 주고받았다. 다시 잘 해나가자면서 굳은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술과 밥을 맛나게 먹었다. 이소선은 간부들이 악수를 나누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끈끈하고 두터운 우정을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다. 죽은 태일이가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영희는 이런 식으로 이들한테 애정 어린 도움을 많이 주었다.
#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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