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균 인천민족문화예술인총연합 사무처장.
김영숙
"만신 김금화 선생님이 진혼굿을 하셨는데 너무 힘들어 하셨어요. 억울하게 수장돼 실종된 사람이 18명 남아있을 때였어요. '오늘 안 풀린다'는 말씀을 굿을 하는 와중에 계속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 들으면서 가슴이 아주 아팠어요. 준비하면서도 많이 울고 행사하면서도 울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김 처장은 당시 위령제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인천평화축제는 작년까지 '월미평화축제'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월미산에 있던 군부대가 2001년에 이전하면서 조성된 월미공원을 평화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인천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노력했다. 2002년 맨발로 월미산 정상을 오르는 행사를 시작으로 2003년부터는 인천민예총 주관의 월미평화축제를 열었다.
"행사 장소가 월미도에 한정되지 않아, 많은 시민이 혼돈하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부터 이름을 바꾼 거죠. 8월이나 9월께 개최하려려 했는데 4월 16일에 국가적 재난이 일어나고 나서 축제를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지금이 오히려 문화예술인의 책무를 실천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한스럽게 죽은 영혼들을 달랠 수 있는 제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으로 '진혼'을 준비했습니다. 세월호가 출발한 곳이 연안부두잖아요. 이거라도 안 하면 못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준비기간이 짧아서 힘들긴 했지만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김금화 선생님도 '이런 일은 내가 해야 한다'고 하셔서 모셨고요."
민예총 인천지회에서 인천민예총으로 독립법인화(사)한국작가회의(아래 작가회의)는 유신의 칼날이 시퍼렇던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 출발했다.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변모했고, 2007년 지금의 작가회의로 발전했다. 작가회의는 세월호 문제, 강정해군기지 반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문제, 4대강 문제 등 시국 현안에 대해 진보적 입장 발표와 행사들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1985년엔 민족미술인협의회(아래 민미협)가 창립돼 민중미술운동을 표방하며 작가회의와 마찬가지로 현안을 비껴가지 않고 제 목소리를 냈다.
한편, 민예총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에 부응해 1988년 12월 23일 민족예술의 발전과 문화예술운동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해 설립됐다. 주로 진보적 문학가를 중심으로 미술·영화·연극·음악에 종사하는 예술인들이 참여했다. 1990년부터 부문들의 협의체 성격을 띤 연합회로 운영되기 시작해 1993년 사단법인화를 추진했고, 1994년부터 지역조직을 건설해 전국적인 기반을 갖췄다.
"인천지회도 1994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민예총의 튼튼한 기반은 작가회의와 민미협이죠. 인천지회도 초창기에는 문학인과 미술인들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민예총은 창립 25주년을 맞아 변화를 모색했다. 2012년 3월, 정지창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각 지회와 장르별 단체를 포괄하는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으로 그 명칭과 성격이 바뀌었음을 선언했다. 이런 변화는 민예총 활동을 지역 중심으로 꾸려가면서 본부 조직을 최소화하고 활동의 중심을 현장으로 옮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중앙집권적 사업방식은 지금의 시대에 맞지 않죠. 그래서 지역별로 독립법인을 만들었고 인천도 작년 2월 독립해 사단법인 인천민예총으로 전환했습니다."부조리와 싸워 세계를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