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택규
최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1심 판결이 있었다. 정치에 개입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국정원법으로는 유죄지만 선거법 위반은 아니라는 판사의 판결문에 수많은 국민들과 지식인들이 권력의 눈치만 보는 법원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동료 부장판사가 실명으로 내부 강령을 어기면서까지도 이번 판결을 비판하며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죽었다'고 울분을 토한 기사를 보며 우리 부부도 함께 분노하며 아파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유가족이 원하는 특별법 통과가 요원한 절망스러운 상황. 아내도 나도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한동안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법원이 삭제한 김동진 판사의 게시글을 읽어본 아내가 불현듯 "이 판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 같다"고 한다. 구약성서 아모스 5장과 예레미야 6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억울한 상처를 법정에서 뇌물을 받고 더 깊게 만드는 이스라엘,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쳐 버리고 오히려 평안을 외치는 이스라엘을 향해 부글부글 끓는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짖었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한 말이 보수적인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도 모르는 순박한 아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한국 사회의 아픔과 정치적 현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했던 우리의 현대사에 눈 뜨기 시작한 아내이지만, 그런 작은 민초의 눈과 입이 더 정확하게 진실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인 9월 5일 현대 신학의 거장 판넨베르크가 별세했다. 그의 스승이자 세계적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가 계시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신의 계시의 가능성을 역사와 자연으로까지 열어두었다.
이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시의 통로라고 생각하는 보수적 개신교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인 신학이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열린 시각과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과 유리되지 않은 정직한 신학에 목 말라있던 피 끓는 신학도(나)를 매혹시켰던 기억이 난다.
판넨베르크 신학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자연과 인간의 역사에서 신의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어린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심지어 기독교인이 아닌 착한 사람들의 정의로운 몸짓에서도 말이다.
아마 판넨베르크도 '김동진 판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에 동의를 할 것이다.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나중에 만나면 꼭 물어볼 생각이다.
사법 체계, 배후 세력 운운하며 진실을 덮으려고 혈안인 정부 여당을 보나, 개혁 의지를 상실하고 지리멸렬하고 있는 야당을 보나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이다. 하지만 판넨베르크의 신학적 사유의 결말이 희망이었듯이 김동진 판사 같은 사람에게서 희망을 본다.
아내와 함께 밤하늘을 보니 별들이 더 밝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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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 '독실한 기독교인' 아내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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