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학교> 김명준 감독.
김영숙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몽당연필'을 만든 직후라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세바시) 피디(PD) 요청에 응했죠. 아직도 '조선학교'라고 하면 재일동포, 조총련, 북쪽, 반 쪽발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어서, 긴장을 많이 했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세바시 출연 동기를 묻자, 김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몽당연필'은 재일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한국에서 조선학교의 가치를 알리고 더 많은 이들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배우 권해효씨가 대표로, 김 감독이 사무총장으로 활동한다.
영화 '우리학교'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조선학교'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묻자, 김 감독은 자세하게 설명했다.
"조은령 감독이라고 미국 뉴욕대 영화과 출신으로 단편영화 '스케이트'로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촉망받던 여성 영화감독이 있었습니다. 조 감독이 재일 조선인 학교에 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촬영감독을 섭외했죠. 그때 함께 했습니다."조 감독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단편영화를 만들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자 한반도에 평화의 물결이 일었다. 그 당시는 어느 종교단체든 통일이 화두였고, 조 감독이 다니던 교회에서도 통일을 주제로 부흥회를 열 정도였다.
그 해 광복절에 방송에서 일본에 있는 '민족학급'에 대한 다큐가 소개됐다. 민족학급이란 오사카나 고베 지역에 있는 일본 학교 내에서 방과후에 조선인 학생들을 모아 우리말을 가르치던 학급을 말한다. 조 감독은 그것을 보고 극영화로 만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 해 일본으로 가 민족학급 교사를 만나 취재하던 중, '민족교육을 잘 알려면 조선학교를 가라'는 말을 듣고 오사카 조선학교를 방문했다. 조선학교 아이들을 만나고 나서 영화 '우리학교'를 기획했고, 극영화보다는 다큐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조총련이라는 존재를 언론에서 들었지만 조선학교니 민족교육 등은 몰랐어요. 그런데 미국에서 학교를 다닌 조 감독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신선했죠. 같이 2002년 3월, 조선학교를 취재하러 갔는데 그때 엄청 놀랐어요."홋카이도 조선학교, '우리학교'의 '우리 아이들'조은령 감독에게는 분단 최초 민간인 신분으로 어느 조선학교든 방문이 가능한 권한이 주어졌다. 그만큼 조 감독은 동포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갔고, 동포사회에서도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2002년부터 촬영을 시작한 조 감독은 2003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많은 교감을 나눈 김명준 감독과 결혼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조 감독이 죽었을 때 동포들은 추도식을 했고 그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의 유골 일부와 함께 나무를 심었다.
김 감독은 부인이 재일 조선인사회에 만들어놓은 신뢰감을 바탕으로 홋카이도 조선학교에 들어가 1년 7개월간 학생·교사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1년 6개월간의 편집기간을 거쳐 영화 '우리학교'를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학교'는 태평양전쟁 전후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들이 세운 민족학교를 말한다. 치마저고리를 교복으로 입고 우리 말,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이 학교는 일본 정부에서 정식 학교로 인정하지 않아, 이 학교 학생들은 대학에 가려면 별도의 시험을 치러야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홋카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의 아이들은 교사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가족처럼 12년을 보낸다. 김 감독도 기숙사의 방 하나를 배정받아 학생들과 먹고 자며 영화를 찍었다.
"제가 '우리학교'를 계속 찍겠다고 했을 때, 저를 아끼는 친구들이 저에게 도움이 안 되는 영화라고 많이 말렸어요. 하지만 이 영화의 프로젝트가 너무 아까웠고 제가 안 하고 누군가 다시 시작한다면 많은 시간이 걸릴 테니 내가 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김 감독은 아내를 잃은 괴로움을 영화를 찍으면서 극복할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계속 우울했죠. 힘들게 밤을 보내고 아침에 다시 촬영하기 위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나가면 초급부 1학년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저에게 안기는 거예요. 그 아이들 앞에서는 자연스레 웃는 얼굴이 되죠. 동포들이 제 사정을 다 알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위로해주시면서 밥도 챙겨주셨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조선학교를 제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보다는 그냥 고향사람 같은 분들과 같이 있는 마음이었죠."없어서는 안 될, '몽당연필''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은 2011년 3월 11일 일본 대지진 이후 조선학교를 돕자는 취지로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공동대표는 동갑내기인 가수 이지상·안치환과 배우 권해효씨가 맡았고, 김명준 감독이 집행위원장으로 함께 했다.
권해효씨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몽당연필'이라는 이름을 지은 사연을 말했다.
"아끼기는 하지만 언젠가 버릴 수밖에 없는, 하지만 없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 있죠. 조선학교 학생들과 몽당연필의 이미지를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몽당연필은 학교를 연상시키기도 해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리말과 역사를 지키면서 일본사회에서 살아온 소중한 이들을 알리고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현재는 '몽당연필'의 사무총장이자 공석인 사무국장의 역할까지 하고 있는 김 감독은 "매달 한 번씩, 12회 공연으로 1년간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학교를 돕던 기존 단체들도 '몽당연필'에 힘을 실어주면서 오히려 재일본 조선학교를 돕는 사업에 우리가 중심에 서게 된 거죠. 제가 활동가는 아니니까 혼자라면 못했을 텐데 여러 사람이 조언도 하고 도와주니까 할 수 있었습니다"라며 "한국사회에 재일동포와 조선학교 아이들을 알리는 일이면 어떤 것이라도 하는 게 우리 단체의 목표입니다"라고 했다.
60만 재일동포들의 염원인 '60만 번의 트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