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창수의 노래공연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황령산 봉수대에서 우창수 노래공연에 참가하고 있다.
박석분
빨리 올리면 12시간 안에 서울에 있는 왕에게 긴급상황을 보고할 수 있던 봉수대는, 임진왜란 때는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왜구가 침략을 감행한 1592년 4월 14일 오전 6시, 황령산 봉수대에 근무하던 부산 사람 배돌이는 바로 봉수를 올렸지만 이 봉수는 부산이 쑥대밭이 된 한참 후에, 3일 후에야 서울에 닿았다. 봉수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탓이다.
왜 그랬을까?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꾼들에 대한 처우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옷도 신발도,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았으니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군사정보체계로 활용되던 봉수대는 임란 후 그 자리를 파발마 제도에 내어주게 된다.
군사정보는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것. 우리 군이 확보한 정보를 일본에 내어주겠다는 한미일 군사정보공유양해각서 체결이 눈앞에 와 있다. 422년 전 제때 올라가지 않은 봉수가 왜구를 도왔다면 지금은 정부가 자발적으로 내주는 군사정보가 자위대를 돕는다.
참가자들은 어렵고 힘들지만 한반도 평화를 지키기 위한 봉수군이 되자는 다짐을 하며 다음 일정을 이어갔다.
기장 두모포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는 죽성 왜성은 구로다 나가마사라는 왜군 장수가 1593년에 장기간 주둔을 목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죽성마을 뒤편에 있는 요충지를 택했고, 둘레는 960미터, 성벽높이는 4미터로 3단으로 축조되었다.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많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와 사기장이 전쟁통에 일본으로 끌려갔다.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이들 기술자와 사기장들을 끌고갔으며 일본 산업과 도자기 제작에 동원했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일본의 경제, 사회,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일본의 경제 문화적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장 출신 팔산이라는 조선 도공은 일본에 끌러가 핫산이라고 불렸는데, 그는 후쿠오카에서 다카도리가마를 창시하게 된다.
왜구는 침략으로 조선인의 피를 뿌리고 살을 도려냈지만 조선인은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도리어 일본의 문화를 발전시켜냈다. 전쟁으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평화만이 발전과 번영을 보장한다.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확인하면서 참가자들은 부산 전역에서 일본으로 피랍되어 돌아오지 못한 조상들의 넋을 기렸다. 그 피와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이 땅에서 평화를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