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대박'을 외치는 교사로만 살고 싶지 않은 이유

[서평] 실천 교육학의 석학이 쓴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등록 2014.11.13 17:32수정 2014.11.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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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교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적막한 운동장. 큼지막한 네 글자가 또렷이 박혀 있다. '수능 대박'. 한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사진이다. 수능은 1994년에 태어났다. 사람으로 치면 20살이 넘은 청년이다. 안타깝게도 풋풋함이나 패기는 없다. 대박을 노리는 승부사들의 끈적한 욕망만 넘쳐 난다. 수능이 '노름판'이 된 지는 오래다.

그래서일까. 교실은 학생들에게 능수능란한 도박을 가르치는 공간이 되었다. 교사들은 어느샌가 한낱 기술자가 돼버렸다. 수능 준비 공정을 충실히 따를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유능함을 인정받는다. 가르치는 보람은 거의 사치다. 학생들이라고 다르랴. 배움의 즐거움은 그들과 무관하다. 틀에 박힌 문제풀이 기계가 그들의 운명이다. 이 모두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게 교육이다. 우리는 과연 "또 다른 교육 더 나은 세상"(이 책의 부제)을 꿈꿀 수 있을까.


한때 교사이자 교원노조 대표였던 저자 마이클 애플은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다. 교육학자인 그가 교육과 정치적 맥락 사이의 관계를 꾸준히 천착하면서 교육운동과 사회 변화에 큰 관심을 기울여 온 배경이다. '실천 교육학', '비판적 교육'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자리매김된 이유이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저자의 학문 여정과 교육 활동을 갈무리한 저작이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의 주된 관심은 교육을 통한 실천에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그 동안 크게 두 개의 프로젝트에 꾸준히 관여해왔음을 밝힌다. 학교 안팎에서 진행되는 교육이 사회의 지배-종속 관계의 재생산에 관여하는 복잡한 방식을 이해하는 것, 사회의 불평등을 막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모순이나 현실에 주목함으로써 그 지배-종속 관계에 도전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이들 두 가지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다. 크게 두 가지 질문이 저자의 문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내 준다. 교육은 단지 지배 관계를 반영하는가. 교육이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가능한가.

교육을 그저 지배 집단을 위한 사회화 도구나 재생산 공정쯤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들에게 애플 식의 '교육을 통한 세상의 변혁'은 한낱 몽상가의 넋두리처럼 들리지 않을까. 교육의 중립성 신화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는 불온한 마타도어처럼 다가올 수도 있겠다. 과연 그럴까.

교육은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에 분명하게 작용한다. … 학생들은 우리가 학교라고 부르는 건물 안에서 그들 인생의 많은 부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과 자신과 같거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관리하는 감정적인 노동을 수행하면서 권위의 관계를 체화한다. 이러한 핵심적인 조직(학교)의 내용과 구조를 변혁하는 것은 우리 행동의 준거에, 우리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에, 그리고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련된 태도와 가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55~56쪽)


저자에 따르면 학교는 인종과 계급, 젠더(gender), 성 정체성, 능력, 종교 등이 벌이는 다양한 역학 투쟁의 중심에 위치한 공간이다. 학교와 교육과정은 집단 기억과 집단 망각을 놓고 벌이는 격렬한 투쟁의 장이기도 하다. 최근 문제가 된 근현대사 교육과정 감축 논란을 상기해 보자. 저자의 말대로 학교는 단지 지배 관계를 반영하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진보적 민주주의의 거대한 강줄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실천을 위한 공간인 셈이다.

학교가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의 공간이라는 저자의 관점은 일찍이 미국 우파가 보여준 사례를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저자가 소개하는 미국 월마트의 경우를 통해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알아보자.


물건을 싼값에 팔면서 소비자와 종업원들에게 '가족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는 월마트는 마치 모범 기업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월마트는 노조에 적대적이며 종업원들의 임금을 최저 수준으로 유지하는 악덕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역사학자 해밀턴에 따르면 월마트는 엄청난 시장 지배력, 세련된 기술, 저임금-저가격 사업모델을 통해 20세기 마지막 사반세기에 등장한 반노조, 규제철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이같은 월마트의 급성장 뒤에는 수많은 대중들의 적극적인 성원과 지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자신들이 평범한 노동자이자 소비자에 불과한 대중들은 바보인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월마트는 주로 미국의 남부 지방에 위치한 백인 위주의 농촌 지역 및 소도시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 그곳 사람들은 개인적인 노력과 확고한 종교적 신념을 통해 자신들이 스스로 월마트를 만들었다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월마트가 경제적인 공룡으로 성장하고, 착취적인 노무관리와 납품업체에 대한 처우로 인해서 끊임없이 소송을 당하고 있지만,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쇼핑을 한다. 많은 지역에서, 사람들은 월마트가 위에서 언급한 덕목들을 체화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제 위기가 심화되는 시기에 월마트는 물건 가격을 내린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곳에서 쇼핑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256쪽)

저자에 따르면 월마트는 지역 대학 기반 친기업 단체인 SIFE(Students in Free Enterprise, '자유기업에 있는 학생들')나 월튼 스칼러스(Walton Scholars: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과 그 아내가 1985년에 설립한 월튼 스칼러십의 장학생)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여기에는 뚜렷한 목표와 의도가 있다. 월마트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경제 제도'에 가까운 자본주의의 비전과 자유무역의 복음, 기독교 비즈니스 원칙 등 보수적인 기독교 우파 활동가들의 믿음을 대중과 아메리카대륙에 있는 제3세계 국가들에 전파한다. 저자는 이러한 월마트의 이야기가 보수주의 근대화 세력이 어떻게, 그리고 왜 사회 변혁의 장소나 도구로 학교를 성공적으로 이용하였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본다.

이 책의 제7장 '비판적 교육, 진실을 말하고 실천하기'에는 저자가 1989년 우리나라를 방문해 전교조 지지 발언을 한 뒤 안기부의 감시와 억류를 당하게 되는 전후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또한 여기에는 저자가 강조하는 실천적이고 비판적인 교육을 위한 문제의식의 핵심이 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나는 교육자들이 어떻게 특정한 교과를 숙지해서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가를 묻는 대신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누구의 지식인가? 이 지식이 어떻게 '공식적인' 지식이 되었는가? 이러한 지식과 이 사회에서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자본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적법한 지식을 정의하는 일로부터 이득을 얻는 사람은 누구이고 얻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현재의 교육적·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고 사회적으로 더 정의로운 교육과정과 교수법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274~275쪽)

모두가 해결하기 만만찮은 질문들이다. 학교와 교사, 학생 앞에 놓인 거대한 벽이 한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 주체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있다. 상명하달 식의 관료적인 교육행정 시스템 역시 기본이다. 속악한 현실이 추동하는 욕망에 휩싸인 채 끌려가는 사회야말로 세상의 진보와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게 냉소주의를 부채질하는 제일의 주범이 아닐까. 현실을 바꾸는 일이 어렵다고 느껴질 때마다 저자가 항상 기억하려고 애쓴다는 두 가지 요점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첫째, 만약 우리가 지금 그들(지배 집단)이 원하는 대로 하고 있다면, 지배 집단은 교육기관들에 대해서 그처럼 화를 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 냉소주의가 창궐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둘째, 우리는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추상적인 수준에서는 알 수 없다. 발코니(현장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위치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에 서 있는 입장에서는 싸움 구경을 위한 편안한 자리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항하는 대중을 모으려는 창조적이고 일관된 노력들 속에 참여할 때 가장 잘 찾아낼 수 있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이 있다. (319쪽)

나는 교사다. 수능일에 '수능 대박'을 외치며 제자들을 응원하는 교사로만 살고 싶지 않다. 성적 만능주의에 빠져 학생들을 '겁박'하는 교사 또한 되지 않으련다. 학생들을 문제풀이 기계가 아니라 '교복 입은 시민'으로 바라보고 싶다. 학생들이 스스로 깊이 생각하고 주변을 두루 넓게 바라볼 줄 아는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럴 때라야 성적 만능주의와 수능 대박이 넘쳐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마이클 애플 지음, 강희룡 외 옮김 / 살림터 / 2014. 10. 10. / 347쪽 / 1,6000원)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 또 다른 교육 더 나은 세상

마이클 애플 지음, 강희룡 외 옮김,
살림터, 2014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마이클 애플 #실천 교육학 #비판적 교육 #수능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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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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