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나리봇짐 지고 야반도주로 고향을 떠나다

[박도 실록소설 ‘들꽃’ (17)] # 제4장 압록강을 건너다 ④

등록 2014.11.30 18:01수정 2014.12.01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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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도라지꽃으로, 꽃말은 '영원한 사랑' '미소' 등이다.
도라지꽃으로, 꽃말은 '영원한 사랑' '미소' 등이다.박도

우리도 만주로 갑시다

나라가 망한 경술 국치 이듬해인 1911년, 왕산 직계 가족은 이미 고향을 떠나 서간도로 갔다. 남은 일가들도 일제의 감시와 학대로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어른들은 집을 바꿔 밤마다 모여 논의한 끝에 남은 일가들도 도사 댁(허헌)에게 선산을 맡기고 모두 임은동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1915년, 허형식은 여섯 살이었다. 2월이 되자 임은동에 남은 임은 허씨 일가들은 만주로 따나고자 일제히 짐을 쌌다. 그런 뒤 허씨들은 서로 집을 바꿔가며 살았다. 일본순사들을 피하고자 그런 꾀를 썼다. 어른들은 아이들 몰래 밤중이면 마을 가듯이 한 집에 모여 쑤군댔다. 어른들은 아이들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한밤중에 쑤군댔지만 머리 굵은 아이들은 눈치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즈음 임은 허씨네 종들과 머슴들도 덩달아 뜰 떠 지냈다. 그들은 주인을 따라 만주로 가느냐, 남느냐로 여러 날 쑤군거렸다. 어느 날 밤, 형식 네 행랑채 마 서방인 마칠봉 내외도 석유호롱불 밑에서 그 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자는 줄 알고 있었던 춘옥이가 슬며시 일어나 아버지 어머니 얘기에 끼어들었다.

"아부지, 어무이, 우리도 만주로 갑시다."

두 내외는 그 소리에 깜짝 놀랐다. 사곡 댁 지말순은 눈을 부릅뜨며 딸에게 말했다.

"너 그 얘기 어디서 들었노?"
"큰 집 은이 아씨님한테 들었어요. 그리고 형식 도련님도 그러더라고요. 춘옥이 너들도 같이 가자고…."
"너 이 말 누구한테 하면 큰일 난다. 일본 순사가 들으면 모두 만주도 가지 못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간다."


춘옥이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떡였다.

 금오산 도선굴에서 내려다본 구미시가지와 낙동강
금오산 도선굴에서 내려다본 구미시가지와 낙동강박도

만주 이야기


"마, 우리같이 천한 것들은 어딜 가도 마찬가지 아니가? 일본 놈 세상 되어봤자 그 놈들이 설마 사람 잡아먹지는 않겠지."

마칠봉은 왠지 살던 고장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만주에는 땅이 어떻게나 넓은지, 산도 보이지 않는다 하고, 거기가면 양반상놈도 없다고 그러대요."

사곡 댁 지말순은 왠지 만주로 가고 싶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우리가 거기 간다고 하루아침에 양반되겠나?"

그때 춘옥이가 이불속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형식이 도련님이 소꿉놀이 때 지 보고 그랍디다. 나중에 만주에 가서 진짜 신랑각시 되자고 예."
"얘, 오를 수 없는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사곡 댁이 깜짝 놀라며 딸을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도 있었다.

"내도 이미 도련님한테 약속했어 예." 

마칠봉은 그 소리에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이 놈의 가시나, 빨리 자!"
"예."

춘옥이는 볼멘소리로 대꾸한 뒤 그 말에 이불을 뒤집어썼다.

안채에서도 허필 내외가, 행랑채에서는 하인 겸 머슴 내외가 만주 이야기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웃 큰집 허발 내외도, 다른 허씨들도, 그 즈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 만주 얘기로 밤 깊은 줄 몰랐다.

사람들은 압록강이란 큰 강만 건너면 신천지 만주 땅인데, 거기에는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는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 몰려들어 홍길동처럼 활약이 대단하다는 둥, 만주 땅은 넓고 기름져서 메밀을 '미친 년 널뛰듯이' 뿌리기만 해도 추수를 한다는 둥, 주로 만주에 대한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오늘의 서울역 이전의 남대문역이다. 1900년 한강철교의 개통으로 열차가 한성부(서울)에 들어왔다. 1922년 오늘의 서울역을 짓기 시작하여 1925년에 완공되어 이 남대문역은 사라졌다.
오늘의 서울역 이전의 남대문역이다. 1900년 한강철교의 개통으로 열차가 한성부(서울)에 들어왔다. 1922년 오늘의 서울역을 짓기 시작하여 1925년에 완공되어 이 남대문역은 사라졌다.NARA / 눈빛출판사

남대문 역

1915년 음력 2월 중순, 날이 풀리자 왕산 가족과 먼저 만주로 떠난 성산 허겸이 임은동에 남은 허씨들을 인솔하고자 고향으로 몰래 왔다. 그때 만주로 떠나기로 한 가구는 다섯 가족으로, 마칠봉 가족도 따라 나섰다. 딸 춘옥이가 죽어라고 가겠다고 나서는데 그 부모도 그만 딸에게 지고 말았다.

만주로 떠나는 임은 허씨들은 괴나리봇짐을 싸들고 그즈음 비어있었던 왕산 댁에서 몇 날을 지냈다. 봄이 무르익어 얼었던 땅이 녹아 멀리 들판에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는 때였다. 왕산 댁에 모인 임은 허씨들은 성산 허겸의 인솔에 따라 저마다 괴나리봇짐을 지고 한밤중에 집을 나섰다. 일본 순사의 눈길을 피하고자 꼭 빚지고 야반도주하는 꼴이었다.

구미 아래 *부상 역으로 갔다. 그동안 동고동락했던 종들은 함께 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려고 부상 역까지 짐을 날라주며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큰 집 종 삼월이는 데굴데굴 구르며 울부짖었지만 끝내 기차에 오르지 못했다.

[*부상 역; 당시의 경부선은 지금과는 달리 약목~구미~김천으로 연결되지 않고, 약목 ~부상~김천으로 연결됐다고 한다. 부상 역은 김천시 남면과 칠곡군 북삼읍 경계에 있는데 지금은 경부고속전철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다.- 필자 주]

성산 허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생전 처음 기차를 탔다. 당시의 기관차는 모두 증기기관차로 달릴 때도 '칙칙 폭폭' 소리와 함께 증기를 뿜었다. 칼을 찬 일본순사들이 객차를 지나다니면서 감시를 했고, 한 의자에 두 사람씩 앉게 했다. 일본순사들은 무서웠지만 철도원들은 친절하게 대하며 아이들에게 '오화당'이라는 알사탕을 나눠주었다. 오색으로 무늬 진 게 무척 신기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것이라 어떻게 먹는지도 몰랐다. 철도원들이 아이들에게 천천히 빨아 먹으라고 가르쳐 주었다.

망명객들이 기차를 탄지 한참 만에 서울 남대문역에 닿았다. 거기에서 다시 합류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자 일행은 모두 7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들 가족단은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한참 달린 끝에 신의주 역에 닿았다. 거기서 모두 기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역사를 빠져나오니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험난한 그들의 앞날을 말해주는 듯했다.

 조선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압록강 철교
조선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잇는 압록강 철교박도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부분은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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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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