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사건 추모승화광장 앞에선 여순사건 희생자 유족들
오문수
여수에도 제주와 같은 평화공원을 만들기 위해 제주를 방문한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단 일행 중에는 여순사건희생자 유족도 있다. 제주 4·3사건 유적지 답사가 끝나갈 무렵 3명의 유족을 만나 여순사건 당시 희생됐던 선친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순사건 발단의 배경
여수 신월리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제주 4·3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로 출동(1948년 10월 20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출동을 하루 앞둔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친일 전력 경찰과 우익을 자처하는 친일 경력 인사들을 살해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과 전남 동부지역을 장악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송호성 준장을 총사령관에 임명해 10개 대대 병력을 동원해 진압을 명령했다.
진압군이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자 수세에 몰린 반란군은 광양 및 지리산 일대로 숨어들었다. 진압군과 반란군 간의 전투에 이은 한국전쟁의 발발로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보도연맹사건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에 저촉된 자 또는 전향자로 분류된 인사들을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회유와 통제를 쉽게 하도록 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위장전향자들과 북한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뿌리 뽑는다는 정부 방침하에 의해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이 이뤄졌다.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이다.
다음은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단으로 참여한 여순사건희생자 유족 3명이 전해 준 이야기다. 여순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10월 하순경, 가을걷이를 끝낸 장두웅(73·당시 5세)씨 동네에 경찰이 들어왔다.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적발한다는 명분으로 마을을 수색하던 경찰이 사촌 형님을 잡았다. 경찰은 일본도로 사촌 형님의 눈 자위를 그어서 피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