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풍호 기타리스트
김영숙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충남 대천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 즈음(년도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함) 서울로 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굶기를 밥 먹듯 하던 때라, 학교는 중요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까지 다니다가 그만 뒀어요.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팔자려니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취미생활이나 하려고 기타를 쳤죠"서울로 오기 직전 대천에 있을 때, 동네 형이 자신이 치던 기타를 노씨에게 줬다. 자신의 키만큼이나 큰 기타를, 그때부터 무슨 보물인양 끼고 살았다.
아무도 그에게 기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라 부모의 구박을 받으며 십여 년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그에게 악보는 '흰 것은 종이요, 검은 줄과 콩나물은 그림'일 뿐이었다.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무작정 기타를 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실력을 알아봐주는 이들이 생겼다.
"야간에 술을 파는 업소에서 밴드를 하던 형들과 한 동네에 살았어요. 한번은 저를 보자고 하더니 꽤 잘 한다며 악보를 내밀더라고요. 악보는 볼 줄 모르고 그냥 소리를 듣고 친다니까, 이해를 못합디다."그 선배들을 따라 야간업소에서 몇 년간 일하면서 악보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어떤 사람의 소개로 TBC(동양방송, KBS의 전신)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연주했다. 그 일을 계기로 당시 인기 절정 그룹이었던 '들고양이들'에 합류했다.
화려한 무대, 그러나...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연주했다. 그러나 사회는 그의 순박한 마음만으로 상대하기에는 만만하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원통합니다. 착하게 열심히만 살면 될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같이 살았던 거지요."밴드 멤버들과의 불화는 경제적 타격으로까지 이어져 공연 수익금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 비싼 악기와 장비를 감당하는 것도 벅찼다.
"국문도 겨우 깨친 제가 영어로 써 있는 악보를 보는 건 불가능했죠. 그때 저는 거의 외워서 연주를 했는데, 공연 전 리허설 때 조금이라도 틀리면 악단장이 제게 심한 욕설을 했어요. 자존심이 상하는 건 기본이고 울화병으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그렇게 십 년을 버티다 밴드를 나왔다. 실력이라면 누구와 겨뤄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음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음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 동기가 많아요. 실력이 없어서도, 돈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못 배웠다는 것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게 한이 돼 지금도 억울해 잠이 안 와요. 눈물이 날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얘기합시다."본업은 운수업이지만 음악생활은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