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 청도, 포항에는 2009년 이후 생긴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이 있다. 왼쪽부터 구미 박정희 대통령 생가 있는 동상, 청도 신도리에 있는 동상, 포항 문성리에 있는 동상.
소중한
박정희 대통령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까? 우리를 '이미' 먹고살게 해준 이가 16년간 집권하고 난 뒤 36년이 더 지났는데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체로 논쟁이고, 그 자체로 갈등이다. 그는 '추앙'의 대상 아니면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한다. 양극의 평가를 아우르는 표현을 찾자면, '사람도 아니다'쯤 될 것이다. 그를 거의 '신'의 차원에서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무참히 탄압하고 살해한 '냉혈동물'로 여기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도무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견해가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박대통령을 '반인반신'으로 경외하는 사람도 독재 사실은 부인하지 않으며, 그를 극악무도한 압제자로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먹고살게 해 주었다'는 주장은 어느정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양극의 평가는 '박정희'라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앞면에는 번쩍거리는 '경제'가, 뒷면에는 낡고 녹슨 '정치'가 새겨져 있다.
동전의 앞뒤가 서로 반박하지 않듯, 박정희의 '두 얼굴'도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양쪽을 번갈아 보여주며 돌 뿐이다. "비록 독재는 했지만, 먹고 살게 해 주었다." "먹고살게는 해 주었을지 모르나, 잔혹한 독재자였다." 하지만 이런 식의 '명-암' 또는 '공-과' 나누기가 옳을까?
만일 '먹고사는 문제'가 박정희 시대의 '공'은 커녕, 끔찍한 '과'라면 어떨까? 여전히 그가 국민들을 먹고살게 해 주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반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나라에서 어떻게 초등학생들이 '9급공무원'을 꿈꿀 수 있으며, '잘 살아 보세'라는 70년대 선거 구호가 (당시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딸에 의해) 재활용될 수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사회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반세기 넘게 생존 하나에 매달려 온 사회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