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으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아버지를 잃은 박귀덕(75) 할머니.
오마이뉴스 장재완
개토제를 위해 차려진 제사상 앞에서 목 놓아 울던 박귀덕(75) 할머니는 1950년 6월 산내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1948년 여수 14연대에 근무했던 박씨의 아버지는 당시 전남 광산군(현재 광주시 광산구)에 있는 자택에 들렀다가 부대에 복귀하던 중 광주에서 연행됐다. 1년 동안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1949년 9월 아버지가 대전 형무소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대전형무소 옆방에서 함께 갇혀 있다 돌아왔다는 이웃의 말을 듣고 대전 형무소를 찾아간 박 씨는 꿈에 그리던 아버지를 만났다. 자신을 공주처럼 예뻐해 주시던 아버지를 본 것은 또 한 번의 면회가 마지막이었다.
1949년 몹시도 춥던 동짓달 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의 속옷을 만들고, 치약을 사들고서 면회를 했던 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후퇴하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산내 골령골에서 살해됐다.
"아버지가 잡혀가시던 날 밤. 자고 가라고 붙잡던 어머니와 할머니를 뿌리치시고 가시던 아버지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이 이름 모를 골짜기로 끌려오실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평생을 그리워하던 아버지. 그러나 박씨는 아버지의 존재를 함부로 말하지도 못하며 가슴 속에 묻고 살아왔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묻고 온갖 고생을 참고 참으며 이날까지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잡혀가시고 1년 동안은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경찰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는 '이 빨갱이 가족들, 어디다 숨겼어?' 하며 발길로 차고 그랬어요. 경찰들이 무명 짜 놓은 것도 다 가져가 버리고, '빨리 말하라'며 윽박질러서... 우리 가족들은 이불 속에서 나오지도 못했어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저는 생똥을 싸기도 했어요."
그렇게 아버지의 존재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박씨는 2007년 정부가 배포한 '과거사 정리 진실규명 피해자 신청서'를 접수하면서 밖으로 나오게 됐다. 그 뒤 그녀는 유족회 활동을 하며 매년 열리는 산내희생자위령제에도 참여하고 있다.
"항상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요즘처럼 몸이 아프면 그저 아버지 곁으로 빨리 가고만 싶어요. 할머니랑 어머니도 얼마나 한이 맺혀 하셨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정말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곳에 오기만 하면 눈물이 펑펑 쏟아져요."
이번 유해발굴을 통해 박 씨는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이 세상에 더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정부가 나서서 모든 억울한 영령들을 위로할 '유해발굴'과 '위령사업'을 진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잠든 골령골을 향해 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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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을 묻혀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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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에서 살해된 아버지, 얼마나 무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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