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넘어 '삶의 질'까지 책임진다는 유신정부'복지사회'를 공약으로 내건 것은 박근혜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도 높은 수준의 '복지사회'를 약속했었다.
강인규
이 약속이 지켜졌는지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탓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가 저격당한 것은 1979년 10월 말이므로, '70년대 말'을 꽉 채우고 돌아가신 셈이다. 게다가 당시 정부는 복지국가가 도래하는 시점을 정확히 제시했다. "국민소득 1000달러의 고지를 점령할 때"라는 것이다.
한국은 1977년에 이미 1000달러 목표를 달성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현재 한국의 국민소득은 2만 8000달러를 초과했고, 올해 3만 달러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 된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10월 대한민국이 올해 '30-50 클럽'에 가입한다고 보도했다. 국민 소득 3만 달러에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명실상부한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인구 5000만 명을 동시에 갖춘 국가를 의미하는 '30-50 클럽'에 가입한다. 전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30K)를 넘고, 인구도 5000만 명(50M)이 넘는 국가는 지금까지 6개국(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일본)뿐이다. '30-50 클럽'에 도달한다는 것은 높은 생활수준과 대외적으로 비중 있는 경제 규모를 함께 갖춰, 강국(强國) 대열에 올라선다는 의미를 가진다."이 대목에서 뛸 듯 기뻐야 할 텐데, 왜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속아서만 살아 온 모양이다. 나 혼자라면 다행이겠는데, 이런 소식에 냉소적 태도를 보내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리라는 데 문제가 있다.
최근 KBS 박종훈 기자는 "벼랑 끝에 몰린 청년, 왜 '붕괴'를 택했나?"(2월 12일자)라는 보도에서 흥미로운 통계수치를 인용했다. 2월 초에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주최로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라는 토론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청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바라는 미래상'을 묻는 질문에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고 말한 사람은 23%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두 배 가까운 42%가 '붕괴, 새로운 시작'이라고 답해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큰 충격을 준 부분은 "큰 충격을 주었다"는 기자의 말이었다. 지난 반세기 넘게 지속해 온 성장모델이 수많은 국민을 빈곤, 좌절, 불행,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만일 '지속적 경제성장'이라는 답변이 '붕괴, 새로운 시작'보다 많았다면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합리적 판단력을 지닌 청년이 두 배나 더 많다는 점에서 나는 희망의 불씨를 본다.
장기침체의 일본보다 처참한 한국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붕괴"라는 말이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년들이 '붕괴'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회 자체가 아니라, 좌절의 원인일 것이다. 만일 사회가 구성원 절대다수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런 사회의 존속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바라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이미 붕괴된 사회다.
언제부턴가 일본은 한국의 '반면교사'가 된 듯하다. 일본처럼 장기침체의 늪에 빠지면 안 된다느니, 일본사회의 절망적 분위기가 가혹한 범죄를 낳고 있다느니, 취직을 포기하고 부모에 의존해 사는 '니트족'이 일본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앞의 기자 역시 일본 청년들로부터 '희망 잃은' 세대의 암울한 이야기를 끌어온다.
일본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앞의 이야기는 한국이 일본보다는 낫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일본은 청년 고용률뿐 아니라, 고용률 지표 전반에서 한국보다 양호하다. 자살률도 한국에 비해 낮으며, 범죄율 또한 살인, 강도, 강간, 폭력 등 강력범죄 모든 영역에서 한국보다 훨씬 낮다. 게다가 일본은 지난 10년간 범죄가 줄어든 반면, 한국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행복지수'도 일본이 훨씬 높아, OECD 주요국가 가운데 (2013년 기준) 한국이 27위를 기록했을 때, 일본은 21위였다. 청소년들의 행복지수 역시 일본이 훨씬 앞선다. 이런 데도 왜 자꾸 일본을 들먹이는 것일까? 2014년 취업률만 봐도, 일본과 한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난해 한국 대졸자의 취업률은 58.6%에 머물렀지만, 일본은 94.4%였고, 고교생 취업률은 그보다 높은 96.6%였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걸핏하면 '일본식 장기불황'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이 '장기침체'에 들어섰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불황이 시작되지도 않은 나라의 국민이 불황의 늪에 빠진 국민보다 더욱 끔찍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이런데, 본격적으로 불황이 시작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해답은 하나다. 혁명적인 복지투자만이 이 나라를 구해낼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이 복지정책을 대대적으로 늘린 때는 돈이 남아돌던 경제활황시절이 아니었다. 복지가 전쟁 직후나 경제공황 당시 국민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점을 기억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자살하는 20~30 세대, 성매매로 연명하는 '산업화세대'국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일인당 소득을 1000달러로 올려주면, 복지국가로 보답하겠다는 게 반세기 전 정부가 한 약속이었다. 이게 거짓이 아니었다면, 3만 달러 시대인 현재는 그 약속의 30배에 달하는 '슈퍼복지국가'가 되어 있어야 옳을 것이다. 이제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 생계, 거주, 의료, 교육을 보장한다는 1970년대 약속만은 지켜라.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사람들인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일궈낸 이들이다. 그들에게 '삶의 즐거움'까지는 주지 못하더라도, '생존'으로는 고민하지는 않게 해야 한다. 그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고, 최소한의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