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굴뚝 외침 'Let's Talk' 지난 1월 14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깔개 위에 청테이프로 'Let's Talk'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들어보이고 있다.
유성호
355일 만에 장례를 치렀다. 갈 곳이 없었다. 내가 살던 집도, 가게도, 가족도…. 난 모든 걸 잃었는데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례만 치른 것뿐인데 마치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이 모두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미웠다.
책임져야 할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은 여전히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용산참사가 잊혀지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었다. 아니 숨었다. 얼마쯤 숨었을까? 이건 아니지. 내가 숨는다고 그날의 고통과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닌데. 숨어 살다 문득 깨달음에 아니다 싶어 무작정 여기저기 투쟁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을 지나는 길에 보니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준비 중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기에 먼발치에서 지켜보는데 투쟁 조끼를 입은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이충연 위원장님 부인이시죠?" 하고 묻는 게 아닌가.
지금껏 나를 '용산 며느리냐?'고 묻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충연 위원장 부인이냐고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생소하면서도 그렇게 묻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네, 맞아요. 근데 누구신지?""저는 쌍용차해고자 이창근입니다. 이 위원장님과 같이 있었습니다!""아~~네, 고생 많으셨네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준 그가 '굴뚝인' 이창근이었다. 옥쇄파업 후 구속 기간 중 남편과 같은 구치소에서 있었던 거다. 물론 둘은 서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을 거다. 그냥 2009년 같은 시기에 구속된 철거민과 노동자였을 거다. 하지만 낯선 세상에 나온 나에게 첫 말을 걸어준 그가 한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그날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구호에 관심이 가고 노동자들의 조끼도 낯설지가 않았다.
작년 여름, 7·30보궐선거에 쌍용차 해고자 김득중 지부장이 출마를 선언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쌍차 동지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무작정 평택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후보 옆에서 수행이라는 걸 했었다. 하루 종일 노동자 후보 김득중을 외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쌍차 노동자들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랬다. 그들은 해고노동자이기 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한 아이의 아빠였다.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가장이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해 가족에겐 미안한 존재였던 거다. 한창 아빠의 손길이 필요했던 아이들에게 부재인 아빠는 늘 투쟁을 외치고 경찰서를 들락날락 거리는, 엄마의 이마에 주름지게 하는 그런 존재였던 거다. 가족이란 글자만 나와도 목소리는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가장이었다.
굴뚝인 김정욱은 보이는 것처럼 성실하고 자상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면 딸,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다정다감한 아빠였다. 제주 강정마을에도 딸, 아들 손잡고 생명평화대행진도 함께 걷고 휴가도 즐기는 그런 멋진 아빠였다. 가족과 함께 할 때면 투쟁 현장에서의 날카로운 발언과 강고한 의지를 결의하는 아빠의 모습은 잠시 숨기고, 그저 세상에 하나뿐인 딸과 아들의 친구 같은 아빠였다. '여기, 사람'인 그들의 삶을 돌려 주어야 한다.
꽃피는 봄날을 위해, 우리의 봄을 앞당기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