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절망한 백인과 희망을 얻은 흑인의 대화

[서평] 코맥 매카시의 소설 <선셋 리미티드>

등록 2015.05.01 18:27수정 2015.05.0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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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빈민가의 어느 공동주택. 방 안에는 두 남자가 싸구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있다. 몸집이 커다란 흑인은 의자에 앉아 있고, 다른 의자에는 티셔츠를 입은 백인 남자가 자리 잡았다. 식탁 위에는 메모지와 연필이 놓여있고, 커다란 냉장고 등이 가구라고는 전부인 곳이다. 그리고, 소설 속의 두 남자는 슬며시 대화를 시작한다.

 : 그래 교수 선생, 내가 선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 왜 댁이 뭔가를 해야 하는 겁니까? (본문 7쪽 중에서)


방에서 복도로 나가는 문에는 자물쇠와 빗장이 잡다하게 달려 있다. 아마도 빈민촌이라 그런 것이겠지만, 왠지 굳게 걸어잠긴 문은 '배수의 진'처럼 느껴진다. 대화를 앞두고 누군가 방을 봉쇄해놓은 것만 같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선셋 리미티드>는 이렇게 단촐한 방과 그 안의 두 사람을 묘사하고서 짧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화만으로 이뤄진 극형식 소설

 코맥 매카시의 소설 <선셋 리미티드> 표지사진.
코맥 매카시의 소설 <선셋 리미티드> 표지사진.문학동네

자못 심각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소설 <선셋 리미티드>는 '소박한 방 안의 두 남자' 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독자를 불러들인다. 마치 대뜸 방 안에 밀어넣고서,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라는 식이다.

본문은 소설에서 가능한, 작가 시점에서의 설명을 대부분 걷어냈다. '백'과 '흑'으로 칭하는 두 사람의 말이 오가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줄 따름이다. 대화만으로 이뤄진 극형식 소설인 것이다. 대화가 점점 오고 갈수록, 책장이 넘어가면서 서서히 둘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줄거리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정보가 주어지는 것은, 마치 안개 가득한 시야가 점차 조금씩 밝아지는 듯하다. 흑인 남성은 살인 전과를 갖고 교도소에서 복역했으며, 현재는 목사로 살아가는 중이다. 백인 남성은 교수로서, 이 날 생일을 맞은 사람이다.


그런데 생일날 아침, '백'은 자살하기 위해서 '선셋 리미티드(뉴욕에서 LA까지 운행하는 급행열차)'에 뛰어들었던 참이다. 같은 시각, '흑'은 출근하기 위해서 승강장에 서있다가 달려가던 백을 품에 안고서 우연히 자살을 막았다. 두 사람을 같은 방 안에 둔 계기는 곧 '삶을 포기한 사람'을 '삶을 이제 막 다시 시작한 사람'이 구해낸 사건이었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강제노동수용소이고, 이 수용소의 노동자들은 제비뽑기로 매일 몇 명씩 끌려가 처형을 당한다는 겁니다." (본문 118쪽 중에서, '백'의 말)


흑인과 백인의 대화는 마치 한 판의 체스게임을 보는 것 같다. 백인은 현실에 절망하고 체념한 상태이고, 흑인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지만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되면서 희망을 얻었다. 둘의 대화는 삶과 세상, 행복과 고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생김새와 살아온 궤적 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은 물러서지 않고 설전을 이어나간다.

한 판의 체스게임 같은 대화

둘이서 대화로 벌이는 한 판의 체스게임은 독자를 방 안으로 불러들인다. 본문을 읽다 보면, 마치 읽는 사람도 방 귀퉁이에 의자 하나를 끌어와서 앉아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백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오늘날의 세상을 비관한다. 흑은 이에 조심스럽게 농담을 섞어가면서 맞받아친다. 한 사람이 자살을 택하려는 순간에 누군가 설득을 시도하는 상황이다.

: 왜, 지금 우리가 벌레가 든 통조림을 열기라도 한 거요? 행복한 걸 왜 문제 삼는거지?
 : 인간의 조건과 정반대니까요. (본문 53쪽 중에서)

둘의 대화는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특유의 분위기와 이야기의 소재에 관객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다. "내가 내일 거기 있을 거야"라고 외치는 낙관주의와 "더 어두운 그림이 늘 정확한 그림"이라는 냉소적인 비관론의 대결은 사뭇 진지하면서도 독자를 웃게 만든다.

"분노는 사실 좋은 시절에나 생기는 겁니다. 이제 그런 분노마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사실 내 눈에 보이는 형체들은 서서히 속이 비어버렸습니다." (본문 135쪽 중에서)

'죽음을 향하려는 삶'을 택한 이와 '삶으로 죽음을 이겨낸' 이의 만남은 흑과 백의 피부색처럼 대비된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각의 관점도 그렇지만, 신의 존재와 현실을 두고 토론하는 두 사람의 생각은 다른 색으로 적힌 것만 같다.

<더 로드><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카운슬러>와 같은 코맥 맥카시의 전작들처럼, <선셋 리미티드>도 토미 리 존스와 사무엘 L. 잭슨 주연의 동명 영화가 만들어진 바 있다. 그의 이야기가 <더 로드> 때처럼 허무한 절망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희망을 보여줄지, 아니면 다른 작품들처럼 끝없이 추락하는 절망을 담아냈을지 독자가 직접 확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선셋 리미티드>(코맥 매카시 씀/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5.1.26/ 1만 1000원)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5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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