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의 집터.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의 낙원상가 바로 옆에 있다.
김종성
약간 여담이기는 하지만, 김굉필이 훌륭한 스승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수업료를 받지 않는 교사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억지로 주는 경우까지는 거절할 수 없었지만, 그는 수업료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만큼 재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재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나 오래도록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김굉필이 수행자의 모습을 갖춘 스승이었다는 점이 일차적으로 조원강의 구미를 당겼다. 그런데 조원강이 죄인을 자기 아들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당시의 지적 풍토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김굉필이 유배를 간 것은, 그의 스승인 김종직이 수험생 시절에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암시적으로 비난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김굉필이 유배를 갈 당시의 임금은 연산군이었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였다. 따라서 세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행위는 연산군의 정통성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김종직의 행위는 연산군의 입장에서 중죄였고, 김종직의 제자라는 것도 연산군이 보기에 중죄였다. 그 때문에 김굉필이 유배를 갔던 것이다.
이 정도면, 김굉필은 연산군 정권 하에서 반정부 인사였다. 오늘날의 공직자들 같으면 이런 낙인이 찍힌 사람한테 자식을 맡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풍토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그것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참스승은 군주나 정부를 상대로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참스승은 군주나 정권에게 빌빌대는 사람이 아니라 당당하게 정의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당시의 지식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수행을 멈추지 않은 김굉필그 시대의 지식인들은 어려서부터 공부한 <논어> 헌문(憲問) 편에 나오는 공자와 자로(子路)의 대화를 기억했다. 제자인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문제에 관해 질문하자, 공자는 "속이지 말고 범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솔직하게 군주를 범하라는 이 말은, 군주의 뜻을 거역하는 한이 있더라도 입바른 소리를 하라는 말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론주도층 중에는 "교육자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세상의 부조리나 통치자의 잘못을 당당하게 지적해야만 참스승이 되고 참된 선비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는 그런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게 그 시대 사람들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를 스승으로 모신 기준(奇遵, 1492~1521년)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스승의 도리를 세운다는 의미인 입사도(立師道)라는 글에서, 사회의 스승인 선비들이 정치적 부조리에 대해 입을 닫게 되면 스승의 도리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기준은 경고했다. 교사가 정치문제에 나서는 게 아니라 교권 붕괴의 길이 아니라, 교사가 정치적 부조리에 대해 함구하는 게 교권 붕괴의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師道, 스승의 도리 혹은 교권)의 몰락을 구제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선비의 기상을 펴는 것이다. 선비의 기상을 펴기 위해서는 선비들이 자유롭게 모여 토론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며, 선비들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이렇게 조선시대 지식인들 중에는 정치적 부조리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인물을 참된 스승 혹은 참된 선비로 간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정당한 정치활동을 하다가 죄인으로 몰린 선비나 스승을 멀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조원강이 정치범 김굉필에게 자기 아들 조광조를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