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서울 성북구청장
성북구청장실
-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 6주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당시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뉴스에서 소식을 듣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때는 봉화까지 어떻게 내려갔는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어요. 봉화에서 노무현 대통령 빈소를 지키는 역할을 했었는데 10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을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서거 당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2010년도에 출마하면서 속으로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놓고 가신 일을 이제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노 대통령께서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고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그분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나, 하고자 했떤 일은 우리나라에서 꼭 이뤄져야 하는 일입니다.
지난 5년간 대통령께서 놓고 가신 일을 하기 위해서 애를 써왔다고 생각하는데, 노 전 대통령처럼 용기가 있거나, 능력이나 재주가 있거나, 혹은 높은 이상을 가졌던 것에 비하면 많이 모자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듭니다. 특히 서민들, 국민들이 너무 힘들어 하기 때문에 대통령 생각이 참 많이 나는 것 같아요."
- 노 대통령의 가치는 '사람 사는 세상'이지만 지금 사회는 '돈이 사는 세상' 같아요."정확히 보셨습니다. 지금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예요. 사람의 가치, 역사, 문화 혹은 정의, 평등, 상식, 염치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 돈 앞에서는 '돈만 가지면 되지 않느냐'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 '권력·염치·양심도 살 수 있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게 우리 사회를 망치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참여정부 때 청와대에서 근무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제 고향이 부산이라 노 전 대통령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특별한 인연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2001년까지 성북구청에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다가 2001년 5월부터 2002년 8월까지 미국 시라쿠스 대학에서 석사과정으로 행정학을 공부했어요.
미국에 있는 한인 유학생들도 노무현 후보에 열광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당내 사정이 나빠지고, 대통령의 실수도 있었고, 이러면서 소위 '노풍'이 꺼진다고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습니다. 귀국해서 보니까 상황이 정말 어려웠습니다.
저는 당시 노 후보 선대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때마침 예전에 같이 인연을 맺고 있던 학생운동 출신 선배들이 노무현 선대위에 합류하게 됐어요. 신계륜 의원이 당시 비서실장을 맡았어요. 저는 선대위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노 후보 선대위에 합류해서 노 전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선거 기간 내내 모시고 다녔어요. 그래서 후보단일화 작업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 좋게도 청와대에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 서거 때 조문받으셨다고 하셨는데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처음에는 시간이 멈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일주일정도 거기서 그냥 거의 씻지도 못하고, 잠은 아주 피곤할 때 조금 잤어요.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오는 시민들을 맞아야 했으니까요. 시민 중에는 아이 손을 잡고 다섯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울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울까? 잠시 울면 되지 몇 시간을 걸려 도착해 30초 밖에 안 되는 조문을 했을까, 슬픔의 실체가 과연 뭘까'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아마도 사람들은 '희망이 죽었다' 이런 생각을 했거나, '희망이 짓밟히는 게 슬프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아이까지 데려와 꼭 보여준 게 아닐까요. 3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대통령께 인사 올리겠습니다'라는 안내 멘트와 '퇴장하시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반복하면서도 그분들의 마음을 담으려고 조심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
- 2009년 5월 23일이 토요일이었는데 올해도 토요일이라 더 생각이 날 것 같아요."그렇네요. 그 생각을 못했네요. 저도 그날 아침은 생생합니다만 기억하기 싫은 날 중 하나이면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기도 합니다."
"내 기억 속 노 전 대통령은... 대쪽 같은 분"- 노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인가요?"저는 2007년 10월에 청와대를 나왔습니다. 2008년도에 총선이 있었기 때문에 총선 준비를 하고 싶어서 나왔는데 그때 뜻대로 잘 안 됐어요. 청와대에서 일하던 비서관과 수석 대부분이 총선 때 성적이 안 좋았거든요. 2008년도 총선 이후 흩어지지 말고 결속을 다지면서 대통령의 정신과 가치를 지키자는 취지로 청와대 출신 정치인 모임 '청정회'를 만들었습니다. 1년에 두세 번씩 봉하에 가서 대통령을 찾아뵙고, 말씀도 듣고, 막걸리도 한잔 하고 그랬습니다.
대통령을 돌아가시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이명박 정부에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덧씌운 수사를 하면서 압박을 가하고 모욕을 줬습니다. 수사가 본격화됐던 2009년에는 직접 노 전 대통령을 뵙기 어려웠어요. 2008년 말이나 2009년 초에 뵀던 것 같습니다. 저는 대통령께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진보의 미래>라는 책의 편집과 집필 과정 일부에 관여했기 때문에 그때 함께 토론하고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어요."
- 김 구청장께서 생각하는 노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습니까?"제가 생각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옛날로 치면 선비 중에서도 이상향을 꿈꾸는, 일종의 혁명가, 이상가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은 학문적으로도 아주 고민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굉장히 똑똑하신 분이었고요. 진리의 탐구에 대한 목마름이 엄청나셨습니다. 한번 본인이 옳다고 믿으면 꼭 실행하는 분이었습니다. 굉장히 자존심이 강하고 속된 말로 '쪽팔리는 것'을 못 참는, 자존심이 강한 대쪽 같은 분이셨죠."
- 노 대통령과의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처음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 제가 정무수석실에 배정받았는데 노무현 대통령께서 저를 잘 모르실 때였죠. 비서실장의 보좌관이니깐 얼굴은 알고 있는데, '이 친구 뭐하는 친구지' 싶었을 겁니다. 2003년 3월쯤 방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갑자기 비서실로 오셨어요. 나가는 길에 제가 인사를 드렸더니 '신계륜 의원한테 쫓겨났나'라고 했어요.
제가 신 비서실장의 보좌관이니까 반갑다는 의미로 한 말이면서도 '내가 널 기억한다'라는 뜻이 있었어요. '(노 대통령이) 사람 잘 기억 못하는데 넌 어떻게 기억하느냐'면서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했어요.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 중 하나죠."
- '어게인(Again) 노무현'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비욘드(Beyond) 노무현'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김 구청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제가 생각하기에는 기초는 어게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은 비욘드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루고자 한 일이나 이뤘어야 했던 일이 많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게인 노무현'을 기초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로부터 13년이 지났습니다. 당시는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였습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도 인정한 사항입니다만, 소위 노동문제와 관련해서 '너무 쉽게 비정규직 빗장을 풀었다, 그게 너무 후회스럽다'라고 말씀하신 걸 직접 들었어요. 그건 노 전 대통령의 잘못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이 낳은 결과였습니다. 시대적 한계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실패가 명확하게 드러났고, 부작용이 크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하려고 했던 정책 중 새정치민주연합이 그대로 진행할 게 꽤 있지만, 시대 상황에 맞게 업그레이드 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나가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노무현의 실제 가치는 대중, 국민, 역사, 시민 앞에서 본인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결단 그리고 헌신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국민을 정말 사랑했고, 시대를 책임지려 하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됐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 전 대통령을 언급하지만, 그의 가치와 정신을 실제에 옮기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정신을 10분의 1이라도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보궐은 재보궐일 뿐... 반면교사 삼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