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
이성애
사실 식사는 우리가 제안했지만 록의 집에 번듯하고 편리한 장비, 도구가 많았다.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록의 캠핑카로 갔다. 내가 준비한 음식은,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한 정체불명의 먹을 것이었다. 반면 니콜이 준비한 요리는 이름이 명확했다. 간장에 졸인 닭다리와 고춧가루와 중국간장으로 재운 돼지고기. 한마디로 고추장 삼겹살이다. 그들이 가진 것을 더 많이 쓰고 먹었지만, 캠핑 분위기는 좋았다. 서로 캠퍼이기에 가능한 상황이겠지.
록은 광산을 설계하는 프리랜서 엔지니어란다. 아마도 채굴을 위한 통로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몇 해 전 몽골에 와서 잠시 일했는데, 휴일도 없이 일했단다. 록이 장난기가 섞인 표정으로 "니콜은 여유 있게 휴가를 보낼 때 나만 일했어"라고 하자 니콜이 "영하 30도에서 어떻게 휴가를 보내?" 한다. 알고 보니 몽골이 한겨울이어서 엄청 추웠단다. 록이 씨익 눈치를 보며 웃는데 제법 귀엽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브리즈번에서 브리즈번 샐러드로, 브리즈번 샐러드에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로,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아웃백으로 바뀌며 어느덧 록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이제 호주로 돌아가 새로운 직장을 구할 것이란다. 호주에는 한중일 사람들이 참 많아서 입맛도 다양하다고 덧붙였다. 호주에 오면 반드시 브리즈번 자신의 집에 들르라고 한다. 보트도 태워 준다고 약속했다.
"아, 보트가 있었구나!"보트도 있고 랜드로버 차도 2대에 1.5에이커(ac)의 땅도 있단다.
"아, 땅도 넓구나!"일단 땅의 단위가 우리에겐 생소한 '에이커'란 점 때문에 록의 아우라는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식사가 끝나자 록은 "이지, 이지"를 외치며 현이 아버지를 끌고 취사장으로 부리나케 갔다. 그날 저녁 설거지를 다음날로 미루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현이 아버지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록의 설거지 속도는 '빛'처럼 빠르다고 한다.
날이 어둑해졌다. 록은 춥냐고 묻더니 하루 종일 캠핑장 스태프들이 빗자루로 쓸어 모은 나뭇잎을 가져와 지저분하게 흩으며 숯불에 태웠다. 록의 독특한 행동-대화하며 배 긁기, 엉덩이에 낀 바지 빼기-는 여러 차례 봐서 그런지 이젠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네덜란드 할머니에게는 분명히 호주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을 안겨주었을 테다. 또 간간이 뀌어대는 방귀 소리와 재빨리 "쏘리, 익스큐즈 미, 오오!" 외치는 게, 그리 민망하지 않으니 신기하다.
직접 무릎을 꿇고 요리의 냄새를 맡으며 "냄새가 좋다"고 말해주는 그가, 설익은 최악의 밥을 먹고도 "오늘 밥 맛있었어요"라고 말해주는 그가, 빛의 속도로 설거지를 하고 소스를 연구하며 요리를 즐겨하는 그가, 와인 먹으러 오라는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도끼로 한국인을 해코지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이렇게 자상하고 섬세한 록을 그렇게 오해했다는 게 난 지금 너무나 가슴 아프다. 호주에는 뱀이 많다는 말에, 한국에는 땅꾼이란 직업이 있으며 예전에 뱀술도 먹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뱀술이 남자에게 좋다는 말과 다음에 브리즈번에 가게 되면 뱀술을 꼭 갖다 주겠다고까지 해버렸다.
그 날이 온다면 직접 밥솥까지 비행기를 태워 가야지. 그래서 꼭 쫀득한 밥을 해주고 싶다. 매운 맛을 좋아하는 록을 위해 오리지널 순창 매운 고추장으로 만든 불고기도 해주고 싶고.
남의 집 남자에게 밥을 해주고 싶은 감정이 솟구치다니. 나 미친 거 아니니?
[에필로그] 다음 날 관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