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 박찬일의 노포여행 <백년식당>
중앙M&B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남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종종 들르는 빵집이 있다. '과자 중의 과자, 태극당'이라는 간판에서부터 오래된 제과점의 분위기가 솔솔 풍기는 곳이다.
해방 이전 일본인 제과점에서 일했던 창업주는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제과점 주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고 간 장비를 받아 빵집 간판을 내걸었다. 70년이나 된 가게다.
어린 시절 푹 빠졌던 '사라다빵','카스텔라' 등을 옛 모양과 맛 그대로 먹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이모·삼촌이라고 부르고 싶은 오래된 직원들이 많다는 것도 이 빵집의 또 다른 특징이자 미덕이다. 그만큼 '사람대접'을 해주는구나 싶어서다.
잡지사 기자를 하다가 돌연 '요리 유학'을 떠난 후 요리사가 된 저자 박찬일은 이 책 <백년식당>에서 이런 가게를 노포(늙을老, 가게 鋪)라 칭한다.
식당에 사람처럼 늙었다는 표현을 하다니. 사실 오래된 식당은 고목처럼 정겨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밥을 먹은 점포이니 인간 대접을 해도 되겠구나 생각한다. 빵집에서 냉면집, 갈비집, 국밥집까지 18개의 노포들이 등장한다. 인간미 느껴지는 노포들, 음식, 사람들 이야기에 빠져 하나씩 찾아가고 싶은 좋은 여행서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우직한 노포의 맛"어머니에게 배운 그대로 합니더. 그래야 맛이 나지예. 뭘 더 맛있게 넣어볼까, 이런 생각은 안 합니더. 그라모 손님들이 '옛날 맛'이 아이라꼬 하겠지예. 그지예?"(부산 할매국밥 편 가운데) 이 책 제목처럼 100년이나 되진 않았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노포가 있지 않을까 한다. 자전거 타다가 들르는 빵집 '태극당', 대림시장 감자탕집, 행주산성 원조 국숫집 등은 나만의 노포다. 이 '늙은 가게'들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한 가지로 좁혀진다.
모두 단순하고 우직한 맛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세와 유행, 트렌드를 좇고 따르기 좋아하는 나라에서 이런 미덕을 유지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시대와 유행에 뒤처진다는 초조함에 많은 식당들이 요즘 잘 팔리는 새로운 음식, 신상 메뉴로 바꾸는 일은 흔하기 때문이다.
위 부산 할매국밥 집 '아지매'의 말처럼 노포들이 옛 맛을 고집하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래야 맛이 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맛있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한다. 아마 이것은 국내외 노포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십몇 대를 잇는 일본 식당의 후계자들은 대개 이런 말을 한다.
"저는 어떻게 하면 선대와 '똑같은' 음식을 지속할 수 있을까에 온 힘을 쏟겠습니다."진하고 얼큰한 보통의 해장국들과 달리 전남 나주의 명물 해장국 '곰탕'은 국물이 맑으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설렁탕과 함께 수백 년 전의 맛이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단순하고 우직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 그것은 감칠맛 나는 비법육수나 식욕을 돋우는 맵고 빨간 양념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신용 있는 거래처와 오랜 관계를 맺으며 받아오는 신선한 식재료와 주인장의 믿기 힘든 부지런함에서 비롯된다.
책 속 노포들 대부분의 주인장들은 새벽같이 나와 밤 늦도록 주방에서 일한다. 놀랍게도 명절에만 쉬는 가게들도 많다. 직원은 돌아가며 쉬어도 주인은 뼈가 부서져라 일한다. 농경민족 특유의 근면함은 농부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노포의 음식은 자극적인 맛이 거의 없고, 재료의 순수한 맛, 씹는 맛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냉면의 원조라 할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 밍밍한 맛만 느껴져 음식이 잘못 나온 줄 알고 직원을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 맛이 없죠? 그게 냉면이에요. 하하!"나이 지긋한 직원 아저씨에게서 무슨 선문답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그 후 몇 해가 더 흘러서야 의도한 듯 의도하지 않은 무위의 예술 같은, 무미의 냉면 맛을 겨우 즐기게 됐다. 김치도 원래는 빨간색이 아니었단다. 얼마 전 부천시 원미동에 많이 있는 '뼈다귀 해장국' 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맛의 비결이 궁금해 2대 주인장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뼈다귀 해장국 맛의 비결이요? 돼지 뼈를 잘 세척하고 삶는 게 기본이에요. 요즘엔 돼지 냄새를 없앤다고 한약재를 넣기도 하는데 한약은 달여 먹어야죠. 정성 들여 돼지 뼈를 세척하고 또 세척합니다. 그게 비결이지요." 노포라고 하면 왠지 허름하고 오래된 식당만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맛있어서 오래 이어진 식당이 노포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 살아남는 이유는 그 식당 음식이 맛있어서다.
우리에게 '백년 식당'이 없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