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물 시장
김동우
시장만큼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곳도 없다.
세계 일주를 하다보면 해당지역의 대표적 재래시장은 언제나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서민의 생활상과 문화를 볼 수 있는 장소로 이만한 곳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형마트가 골목상권까지 치고 들어오는 우리의 상황은 뭔가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암튼 각설하고 다시 남미로 돌아와, 푸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발디비아'(Valdivia)에 가면 수산물 시장이 있는데 가격이 정말 착하다.
치고받고 흥정을 할 것도 없이 홍합 1kg 1000원, 게 3마리 2000원, 성게 하나 1000원 등 각종 해산물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간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 주변으로 바다사자가 한가로이 망중한을 즐기는 모습 또한 놓칠 수 없는 장면이다.
[에필로그] 칠레 출입국 검역 이야기검역관은 버스에 실려 있는 짐을 모두 꺼내라고 했다.
잘 훈련된 개 한 마리가 가방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살폈다. 승객 모두가 긴장한 눈치였다. 뱃속에 든 것 말고는 날 것 대부분이 넘어갈 수 없는 땅 칠레. 내 배낭 안에는 라면·햇반·참치 캔 등이 들어 있었다. 모두가 밀폐된 포장음식이었기 때문에 한편으론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까다로운 검역으로 소문이 자자한 칠레 국경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킁킁. 킁킁.'냄새를 맡던 개가 귀여운 앞발 차기로 가방 하나를 툭툭 건드렸다. 개가 지목한 배낭에선 양파 2쪽이 나왔다. '크크크' 배낭 속에서 마약 같은 엄청난 게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고작 양파 쪼가리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론 알뜰한 '여행의 기술'에 내심 존경심이 들었다.
잠시 뒤 치과 의사 앞에서 신경치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배낭을 엑스레이 기계에 넣었다. 검역관은 기계를 빠져나온 내 배낭을 매의 눈과 사자의 발톱으로 낚아챘다. 순간 쭈삣하고 신경이 곤두섰다.
검역관은 여행 중 정말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배낭 뒤집기를 시작했다. 양파 쪼가리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파키스탄 출국 이후 두 번째로 배낭 안에 모든 짐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적나라한 속살이 수십 개의 눈앞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검역관은 짐을 헤집으며 빨간색 포장에 매울 '신'(辛)자가 써진, 그들에게는 도대체 알아먹을 수 없는 봉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라면으로 인한 '트라우마'(Trauma)는 세계 일주 1막에 소개된 킬리만자로 트레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이번엔 라면 요리법이 문제가 아니고 아예 압수를 당할 처지였다.
'된장!'검역관은 거의 가루가 된 채 부스럭거리는 라면이 못 미더운지 봉지를 꼼꼼히 살폈다. 봉지는 고도 때문에 약간 부풀어 있었다. 사춘기 소녀처럼 순간 '빵'하고 터질 같이 위태로운 라면 한 봉지의 운명은 털 많은 검역관 손에 달려 있었다.
그동안 알토란같은 라면 봉지를 고스란히 사수하기 위한 내 노력은 눈물겨웠다. 짐을 꾸릴 때 항상 전자기기 다루듯 배낭 안에서 제일 좋은 곳에 자리를 내주었고, 봉지가 터지는 걸 막으려고 옷가지로 푹신한 쿠션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인연을 끝내고 싶진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뱃속에 모셔 두는 건데….'검역관은 빨간색 봉지를 어찌하지 못하고 옆에 있는 상사에게 조치를 물었다. 상사는 내게 "이게 뭐냐?"고 물었고, 난 "인스턴트 누들"이라며 최대한 공손한 말투와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답했다.
라면을 건네받은 상관은 믿을 '신'(信)이 아니라 매울 신이란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라면 봉지를 재차 흔들었다.
'쓱쓱~ 쓱쓱~'라면 부스러기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이것들아 고만 흔들어 터진단 말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올 턱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검역관은 "인스턴트 누들?"이라며 재차 물었고,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예, 예, 예! 코리안 인스턴트 누들!"이라고 반색하며 답했다.
검역관은 의심의 눈초릴 거두지 못하고 다시 시선을 라면으로 옮겼다. 난 수능 성적표를 기다리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패스."그는 빵빵해진 라면 봉지를 내 옷가지 위에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무챠스, 무챠스, 그라시아스!"난 진심 '레알' 감사를 담은 인사를 난사하며, 입을 벌리고 있는 배낭에 무식하게 짐을 쓸어 넣었다. 다른 걸 트집 잡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패킹을 똑바로 할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거의 가루가 된 라면 한 봉지를 냉가슴에 끌어안고 국경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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