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북한에서 탈출하면서 배낭 속에 넣어 온 톨스토이의 일어판 소설 <영생의 길>(1927년, 중앙공론사). 나는 지금도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김명곤
이윽고 나와 친구를 태운 트럭은 고향 마을을 뒤로하고 어스름 저녁 신작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트럭에서 내뿜는 매캐한 연기와 히뿌연 흙먼지에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후창강을 오른쪽으로 휘돌아 갑자기 꺾여진 길목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정말 떠나게 됐다는 안도감과 아울러 가슴이 휑했던 느낌이 지금도 떠오른다. 아무리 드센 기질의 함경도 여자라 하더라도 남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종무소식인데다, 장남까지 광복절 기념 대 축제를 앞두고 피신시키듯 남으로 떠나 보냈으니, 어머니는 아마도 집에 돌아 가셔서 가슴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셨을 것이다.
우리를 태운 트럭은 얼마 동안은 후창 인근의 신작로를 달리다 외곽의 심하게 울퉁불퉁한 산길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경비원들의 검문에 걸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부러 산길을 택한 것이다. 우리를 태운 트럭이 좌우로 뒤뚱거리며 사정없이 털털 거리는 길을 4~5시간쯤 달리자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잠시 정차하여 식당을 찾아서는 냉면을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하여 두어시간쯤 달려 강계에 도착할 무렵 검문소가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우리는 걸어서 강계에 도착하여 자그마한 여관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강계역에 가서 평양행 기차표를 끊었다. 그리고는 등에 걸머지고 가던 배낭을 짐칸에 미리 넣고는 빈 손으로 기차에 올라 탔다. 짐을 직접 가지고 가는 경우 순찰 요원들에게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차 안은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짐작하기에 어딘가로 피신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승객들이 많았다. 고향에서부터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삼팔선을 넘어 남으로 갔다는 얘기를 듣던 터였다.
일단 평양행 기차를 타고 보니 처음 떠나올 때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나, 여전히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차에 탄 사람들의 행색이나 창가로 종종 내비치는 정차역 지역의 주민들의 표정이나 왠지 초조하고 불안하고 뒤숭숭 해 보였다. 종종 검표원들이 기차 안에서 표를 조사하는 와중에 행색을 살피며 행선지를 묻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마음을 졸이곤 했다. 북한 지역은 산이 많아 수많은 터널을 지나치게 되는데, 숨가쁘게 달리는 기차가 터널들을 통과할 때마다 눈이 부셔서 졸던 눈을 번쩍 떴던 일들이 떠오른다.
한참을 달리던 기차가 제법 긴 시간을 개천에서 정차했다. 개천은 고향에서 방학을 마치고 안주 중학교에 갈 때마다 내렸던 곳으로 익숙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작은 기차가 앞뒤로 여러 번 오가며 선로를 바꾸고는 안주행 승객을 태웠는데, 우리는 그 기차를 '빽기차'라고 불렀었다. 우리는 출출하던 차에 기차에서 내려 떡과 과일을 사먹고는, 순천을 거쳐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에 도착했다. 고향 후창을 떠나 평양까지 11시간에서 12시간 가량 걸린 것으로 기억한다.
평양은 사람들로 넘치고 있었고,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평양의 뒷골목은 달랐다. 어느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가만히 엿들으니 그 중에 상당수가 남으로 탈출을 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투숙객들이었다.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삼팔선의 경계가 강화되고 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개미새끼 한마리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될 것이란 소문이 나돌고 있다 고 했다. 어떤 이는 탈출을 시도하다 붙들려 가서는 교화 노동형에 처해지거나 삼팔선을 넘다 총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곳 저곳에서 수군덕 거리는 얘기를 들으니 육로로 이리저리 피해 삼팔선을 넘는 것 보다는 야밤에 어부를 가장하여 고깃배를 타고 강을 건너 탈출하는 것이 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해주에서 만난 남자 "내가 남으로 데려다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