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공사 전에 곰나루에서 본 금강 하류.
이경호
공산성 맞은편 금강백사장(지금은 신관둔치공원)에서 막걸리를 받아다 놓고 놀던 기억도 아련하다. 갈수기에는 공산성 공북루 코앞까지 걸어가서 좁아진 강물을 바라보고 놀았다. 1985년 휴학을 하고 공주사대 학생들과 어울리던 때, 여러 번 금강백사장으로 나갔다. 막걸리를 받아 가서 아직 해가 중천에 있던 시간에 낮술로 시작해서 사방이 어둑해지면 금강교를 건너 맞은편 공산성 누각으로 올라가 강을 내려다보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양성우 시에 곡을 지은 민중가요를 합창하기도 하고.
금강백사장은 백제문화제가 격년제로 치러지던 때 공주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출발한 행렬이 공주시내를 다 통과해서 금강교를 건너서 백사장까지 와서 거기서 강강수월래 같은 놀이를 하기도 했다. 문화제에 참여한 시내 고등학생들이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어울려서 장난질을 쳤다.
그 시절 유구천, 정안천 등 금강의 발달한 지천에서는 노상 고기잡이가 잘 되었다. 동네마다 고기를 잘 잡는 친구들이 한두 명씩 있었다. '어부'로 불리던 친구들은 지금은 금지된 투망치기 선수였다. 투망 같은 제대로 된 어구가 없어도 냇물 풀숲을 뒤져 곧잘 고기를 잡아왔다. 지금은 어딜 가나 팔뚝만한 베스가 어족을 평정했다지만, 그때는 칠어, 갈갈이, 쏘가리, 모래무지 등이 풍부하게 잡혔다.
여름철에는 해만 뜨면 물가로 천렵 가는 것이 일이었다. 우성면과 사곡면의 경계를 이루는 통천포(동천보)에는 허가 내지 않은 유원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야트막한 보가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릴 데도 있고 버드나무숲이 우거진 그늘에 솥단지를 걸어놓고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아오기를 기다려 집에서 가져간 재료로 갖은 양념을 해서 매운탕을 끓여먹었다.
항상 물고기가 많이 잡히던 그때 먹던 매운탕과 어죽맛은 지금도 내 입맛의 기준이 되었다. 밤늦도록 친구들과 텐트 비슷한 것을 쳐놓고 막걸리 타령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를 우성면 소재지인 동대리에서 다녔던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집은 통천포 옆이라고 알기 쉽게 말해주었다.
금강과 어울려 사는 법을 알았다금강백사장(지금의 신관둔치공원)이나 곰나루백사장, 통천포, 우성초등학교 앞 냇물 같은 곳에는 여름 한 철 작은 해수욕장 유원지가 생겼다. 초등학교 수업만 마치면 냇물 가서 노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여름철 강물에는 바닥이 갑자기 깊어진 곳이 있어 해마다 꼭 한두 명의 어린아이들이 익사하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는 그 부모들이 멱감다가 죽은 아이의 넋을 건지는 굿을 하기도 했는데 동네어른들은 가까이 가서 보지 못하도록 말렸다.
옛날부터 금강변 풍광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누정이 세워졌다. 연전에 충남향토연구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금강변에는 연기(세종)에 7곳, 공주에 15개, 부여에 18개, 논산 6, 서천 7개 등 60개가 조사되었다. 금강의 풍광과 기암 괴벽, 평야가 잘 보이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금강 8정'으로 연기의 독락정, 금벽정, 한림정, 공주의 쌍수정, 사송정, 벽허정, 안무정, 원산정 등을 지었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금강과 어울려 사는 법을 알았다.
금강은 공주의 온갖 음식점, 다방, 도로, 다리 등은 물론 수많은 단체, 모임들에게 이름을 빌려주었다. 오죽하면 전두환 정권은 1981년 공주사대 학생들의 독서회를 보안법 위반으로 잡아들이면서 '금강회'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까.
4대강 공사로 생긴 공주보 때문에 막힌 물이 썩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혀를 차는 시민들이 아주 많다. 좋았던 그 시절 풍광과 자연생태계를 추억담으로 들려주는 어른들도 많다. 머지 않아 금강을 살리기 위해 결단을 하는 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물이 다시 흐르는 그때가 되면 이 아름답고 정겨운 금강을 조망할 수 있는 누정을 몇 곳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