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예찬 앞표지
현암사
이 책의 저자 이디스 그로스먼은 스페인어 소설을 영어로 옮기는 번역가다. 특히 마르케스 번역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글들은 애초에 책으로 펴내기 위해 쓴 게 아니다. 그로스먼이 예일대에서 한 강연을(서문, 1장, 2장) 바탕으로 한 글과, 순전히 이 책을 위해 추가로 쓴 글(3장)을 합쳤다. 이 책에 정교한 이론은 없다. 독자들을 향해 그로스먼 자신의 번역에 대한 철학을 조근조근하게 이야기 할 뿐이다. 하지만 그로스먼이 가지고 있는 번역가로서의 자존감 때문에 풀어내는 이야기의 무게는 무겁다.
번역가는 작가다먼저 출발점. 그로스먼은 문학 원작 자체도 비실재적인 관념을 언어로 변환시킨 번역으로 본다. 똑같이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원저자의 권위와 번역자의 권위는 동일한 위치에 선다. 번역가는 단순히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기계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다. 번역가는 번역의 과정에 완전히 녹아 들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창조적으로 또 다른 한 편의 예술을 만들어내는 작가다. 주지할 건, 이와 동시에 엄연히 원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번역가의 글은 번역가 자신의 글이고 원저자의 글이기도 하다. 이 역설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로스먼이 말하는 바는 이렇다. 훌륭한 번역가는 이 역설 사이에서 망설이지 않는다. 언어란 한 민족의 사회·문화·정치·경제 등 모든 요소가 녹아 들어가 뒤섞여 있는 혼란의 용광로다. 어떤 언어의 한 단어도, 다른 언어의 한 단어와 동일하지 않다. 이 상황에서 번역가는 일단 자신이 번역할 책(출발어)의 커다른 상을 최대한 작가 본래의 의도를 따라가며 그린다. 그 다음, 작품이라는 큰 문맥 속에서 개별 문맥 속의 뉘앙스와 제스처를 세심하고 민감하게 읽어낸다. 이렇게 읽어낸 뉘앙스와 제스처를 고이 보존한 채 도착어로 변환한다.
직역, 의역, 반역, 예술마지막으로, 번역된 도착어를 도착어 자체의 의미와 뉘앙스를 품게 한 채 단어 하나와 문장 하나, 문장 하나와 문단 하나, 문단 하나와 작품 전체의 관계를 고려하면서 다시 수정한다. 이 과정은 끝나지 않는다. 때문에 번역은 완성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다. 번역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가진, 하지만 최선의 수는 반드시 존재하는 '조율'에 가깝다.
그로스먼의 주장에 동의한다. 실로 직역주의란 언어의 생성과 용해의 지층을 전혀 보지 못하는 조야한 지성과 게으른 의지의 산물이다. 기표 밑에서 기의는 끊임없이 용솟음친다. 우리가 하나의 단어를 내뱉는 순간 이미 그 시간만큼 그 단어의 의미는 변해 있을 텐데, 어떻게 직역이 가능하냐, 이 말이다. 번역은 반역이 아니다. 모든 직역이 반역이다. 반대로 창조의 생생한 의지를 가진 성실한 의역은 원작을 보존하면서 재창조하는, 예술이다.
세상의 모든 번역가가 그로스먼과 같이 번역에 대한 고매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고, 출발어와 도착어 양쪽에서 깊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면, 위와 같이 번역하는 게 옳다. 쉽지 않다. 창조로서의 번역은 무척 고된 일이다. 결정적으로 대부분의 독자들은 번역에 별 관심이 없다. 슬프다.
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현암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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