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티쩌우
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사이공의 흰옷>의 원작은 베트남 작가 응우옌반봉의 소설 <흰옷>으로 1972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응우옌티쩌우'라는 실존 인물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1960년대 베트남 남부에서 이름을 날린 청년 열사 응우옌반쪼이, 시인 레안쑤언과 함께 회자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출판 상황이 아주 열악했던 전쟁 시기에 북베트남에서 출간된 탓에 정작 소설의 무대인 남베트남에서는 아주 극소수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 베트남 문학출판사에서 출간된 <응우옌반봉 선집 2>에 이 소설이 다시 수록되고, 응웬티쩌우의 이야기는 1950,60년대 남베트남의 학생운동사를 회자하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왔다.
시내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치민시 10군에 살고 있는 응웬티쩌우 여사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사이공의 흰옷>의 주인공, 가난한 농촌 출신의 여학생 '홍'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나가 신선한 용과를 사왔다며 주방을 오가는 그의 모습은 77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해보였다. 젊은 시절 극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가 이토록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날 만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남편 레홍뜨가 자리를 함께했다. 그 역시 베트남에서는 아내 못지않은 유명인사다. 두 명의 살아 있는 전설이 우리들의 맞은편에 앉아 용과를 자르고 차를 따르며 접대를 하느라 부산했다. 하얀 백발 아래 두 눈동자가 치열했던 한 시대를 방금 통과한 듯 강렬하게 반짝였다. 시간이 허락되었더라면 밤을 지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밥 먹듯이 지각을 하던 우등생 소녀 람응우옌티쩌우는 1938년 사이공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엔호아 성의 솜짜이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쩌우는 다섯 형제자매 가운데 장녀였다. 11살이 되던 어느 날, 감옥에서 막 출옥한 아버지가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쩌우는 10개월 된 막내둥이를 업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오래전부터 혁명 활동을 해오던 아버지가 경찰에 붙잡혀 보름간 온갖 고문을 당한 후 겨우 숨만 붙은 채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쩌우가 곁에서 아버지를 간호하며 동생들을 돌봤다. 아버지는 절친한 고향 친구를 불러 가족을 돌봐달라고 당부하고는 2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쩌우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혁명 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 9살 때부터 쩌우는 아버지를 도와 서신전달이나 연락 업무를 도왔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면 쩌우는 동생들의 아침 식사를 챙겨야 했다. 10시를 훌쩍 넘겨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면 그제야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런 쩌우를 맞이하는 것은 선생님의 불호령과 따끔한 회초리였다. 선생님이 자꾸 늦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만 쩌우는 입을 다물었다. 찰싹찰싹 매서운 회초리가 이어지며 선생님이 자꾸만 지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어린 쩌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일요일, 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쳤다. "세상에나 람(Lam)이 언니 동생이었어요?" 람은 쩌우의 아명이었다. 어머니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응, 내 아이야"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쩌우를 '성실한 럼'이라고 불렀다. 같은 반에 동명이인의 럼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게으른 럼'이라고 불렸다. 매일없이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학업서만큼은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쩌우에 대한 선생님의 총애가 깊어지자 질투를 하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시장 바닥에서 장사나 하는 주제에"라며 조롱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면 참지 않고 달려가 매운맛을 보여주곤 했다. 상대할 쪽수가 많을 때는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집의 아이들을 모아 함께 싸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1년간은 학교마저 다니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온 쩌우는 한이 맺힌 듯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고는 비엔호아 성 최고 수석으로 중학교를 졸업한다. 사람들은 우등생인 쩌우가 사이공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간신히 해결했지만 숙식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비를 감당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한 아저씨가 쩌우를 찾아와 500동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부로 아저씨는 담배를 끊었다. 매달 담배 살 돈으로 500동씩 부쳐줄 테니 학교에 가려무나" 그렇게 해서 쩌우는 고향 비엔호아를 떠나 말로만 듣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발을 딛게 되었다.
투쟁과 함께 찾아온 사랑, 그리고 이별사이공에 정착한 쩌우는 반랑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당시는 친미독재 정치로 악명이 높던 응오딘지엠 정부 치하였다. 교내에 일체의 정치성을 띤 동아리는 물론 학생들의 자치조직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쩌우는 빈민구제사업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고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사이공과 그 인근 지역에서 중고등학생, 대학생, 청년들을 조직화하여 남베트남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는 투쟁을 이끄는 것이었다.
반랑 학교의 같은 반에는 레홍뜨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쩌우보다 3살 연상인 그는 당시 반랑 학교 노동청년단 서기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뜨는 처음부터 쩌우를 눈여겨봤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까만 머리카락에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당찬 미소의 쩌우에게 남학생이라면 누구든 마음이 흔들렸다. 쩌우와 마찬가지로 뜨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고단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나누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교내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두 사람은 목숨을 담보로 한 비밀 투쟁을 이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깊은 감정이 싹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