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의 흰옷> 실존 인물, 응우옌티쩌우를 만나다

[아맙이 만난 사람] 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등록 2015.06.30 20:06수정 2015.07.01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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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다발의 삐라와 신문 감추어진 가방을 메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새처럼 잠든 사이공을 날아다닌다
복습은 끝나지도 않고 평온한 밤도 오지 않았다
내일도 수업시간엔 잠이 오겠지 그러나 간다 내일도 내일도
- 노래 <사이공의 흰옷> 중에서

1960년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생사를 건 투쟁을 감행하는 청년들의 학생운동을 다룬 소설 <사이공의 흰옷>.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 한국에 소개돼 당시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던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의 시인 레안쑤언이 <사이공의 흰옷>의 주인공 '홍'의 실제 인물인 응우옌티쩌우에게 헌사한 시 '사이공의 흰옷'이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어지고 소설의 인기가 19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이어져 <전환시대의 논리>, <전태일 평전>, <철학에세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테디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2006년에는 베트남과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고 <하얀 아오자이>란 제목으로 다시 번역해 출간됐다. <사이공의 흰옷>은 베트남과 한국이 역사와 문학을 통해 어떻게 만나고 소통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응우옌티쩌우
응우옌티쩌우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사이공의 흰옷>의 원작은 베트남 작가 응우옌반봉의 소설 <흰옷>으로 1972년에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응우옌티쩌우'라는 실존 인물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1960년대 베트남 남부에서 이름을 날린 청년 열사 응우옌반쪼이, 시인 레안쑤언과 함께 회자되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출판 상황이 아주 열악했던 전쟁 시기에 북베트남에서 출간된 탓에 정작 소설의 무대인 남베트남에서는 아주 극소수만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95년에 베트남 문학출판사에서 출간된 <응우옌반봉 선집 2>에 이 소설이 다시 수록되고, 응웬티쩌우의 이야기는 1950,60년대 남베트남의 학생운동사를 회자하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왔다.

시내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치민시 10군에 살고 있는 응웬티쩌우 여사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사이공의 흰옷>의 주인공, 가난한 농촌 출신의 여학생 '홍'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 나가 신선한 용과를 사왔다며 주방을 오가는 그의 모습은 77세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해보였다. 젊은 시절 극심한 고문과 고초를 겪어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가 이토록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다.

이날 만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남편 레홍뜨가 자리를 함께했다. 그 역시 베트남에서는 아내 못지않은 유명인사다. 두 명의 살아 있는 전설이 우리들의 맞은편에 앉아 용과를 자르고 차를 따르며 접대를 하느라 부산했다. 하얀 백발 아래 두 눈동자가 치열했던 한 시대를 방금 통과한 듯 강렬하게 반짝였다. 시간이 허락되었더라면 밤을 지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조곤조곤 이어졌다.  


밥 먹듯이 지각을 하던 우등생 소녀 람

응우옌티쩌우는 1938년 사이공의 북동쪽에 위치한 비엔호아 성의 솜짜이라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쩌우는 다섯 형제자매 가운데 장녀였다. 11살이 되던 어느 날, 감옥에서 막 출옥한 아버지가 만신창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쩌우는 10개월 된 막내둥이를 업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오래전부터 혁명 활동을 해오던 아버지가 경찰에 붙잡혀 보름간 온갖 고문을 당한 후 겨우 숨만 붙은 채 산송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쩌우가 곁에서 아버지를 간호하며 동생들을 돌봤다. 아버지는 절친한 고향 친구를 불러 가족을 돌봐달라고 당부하고는 2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쩌우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혁명 활동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어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 9살 때부터 쩌우는 아버지를 도와 서신전달이나 연락 업무를 도왔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갈 시간이면 쩌우는 동생들의 아침 식사를 챙겨야 했다. 10시를 훌쩍 넘겨 어머니가 시장에서 돌아오면 그제야 책가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런 쩌우를 맞이하는 것은 선생님의 불호령과 따끔한 회초리였다. 선생님이 자꾸 늦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지만 쩌우는 입을 다물었다. 찰싹찰싹 매서운 회초리가 이어지며 선생님이 자꾸만 지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어린 쩌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일요일, 시장에서 어머니를 도와 장사를 하고 있는데 우연히 선생님과 마주쳤다. "세상에나 람(Lam)이 언니 동생이었어요?" 람은 쩌우의 아명이었다. 어머니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응, 내 아이야"라고 답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쩌우를 '성실한 럼'이라고 불렀다. 같은 반에 동명이인의 럼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 아이는 '게으른 럼'이라고 불렸다. 매일없이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학업서만큼은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쩌우에 대한 선생님의 총애가 깊어지자 질투를 하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시장 바닥에서 장사나 하는 주제에"라며 조롱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면 참지 않고 달려가 매운맛을 보여주곤 했다. 상대할 쪽수가 많을 때는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집의 아이들을 모아 함께 싸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1년간은 학교마저 다니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돌아온 쩌우는 한이 맺힌 듯 공부에 열중했다. 그러고는 비엔호아 성 최고 수석으로 중학교를 졸업한다. 사람들은 우등생인 쩌우가 사이공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아 학비는 간신히 해결했지만 숙식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비를 감당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든 한 아저씨가 쩌우를 찾아와 500동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부로 아저씨는 담배를 끊었다. 매달 담배 살 돈으로 500동씩 부쳐줄 테니 학교에 가려무나" 그렇게 해서 쩌우는 고향 비엔호아를 떠나 말로만 듣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발을 딛게 되었다.

투쟁과 함께 찾아온 사랑, 그리고 이별

사이공에 정착한 쩌우는 반랑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당시는 친미독재 정치로 악명이 높던 응오딘지엠 정부 치하였다. 교내에 일체의 정치성을 띤 동아리는 물론 학생들의 자치조직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쩌우는 빈민구제사업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를 벌고 조직의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사이공과 그 인근 지역에서 중고등학생, 대학생, 청년들을 조직화하여 남베트남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는 투쟁을 이끄는 것이었다.

반랑 학교의 같은 반에는 레홍뜨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쩌우보다 3살 연상인 그는 당시 반랑 학교 노동청년단 서기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뜨는 처음부터 쩌우를 눈여겨봤다. 흑진주처럼 빛나는 까만 머리카락에 하얀 아오자이를 입은 당찬 미소의 쩌우에게 남학생이라면 누구든 마음이 흔들렸다. 쩌우와 마찬가지로 뜨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고단한 하루하루의 일상을 나누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무엇보다도 교내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던 두 사람은 목숨을 담보로 한 비밀 투쟁을  이어가면서 서로에 대한 깊은 감정이 싹텄다.

 학생운동 당시 레홍뜨(좌측)와 응우옌티쩌우.
학생운동 당시 레홍뜨(좌측)와 응우옌티쩌우.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그러나 정작 뜨가 사랑을 고백했을 때 쩌우는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며 차갑게 거절한다. 지금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 동생들을 돌보며 공부에 열중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에도 뜨의 구애는 멈추지 않았고 쩌우는 매번 그를 거절했다.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투쟁의 나날 속에서 쩌우는 자신에게 사랑을 허락할 수 없었다. 학생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던 뜨가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르면서 학교를 옮기게 되었고, 쩌우는 2년간 고의로 졸업시험에 낙방하며 뜨의 빈자리를 대신해 반랑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이어갔다.

감방의 벽에 써내려간 시 '흰옷'

1961년 2월 9일 늦은 오후, 집으로 돌아가던 쩌우의 앞길을 낯선 택시가 막아섰다. 쩌우가 끌려간 곳은 레반주옛 캠프로 당시 수도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경찰의 취조를 받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 풀려난 것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상개조실에 들어서는 순간 쩌우는 자신이 '붙잡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사상개조실 뿐만 아니라 동물원의 암실, 군 교도소 등을 돌며 온갖 고문과 취조가 이어졌지만 쩌우는 굴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단식투쟁을 이어갔고 간수들이 몸을 땅에 파묻고 구타하며 취조를 하면 목청을 돋워 노래를 부르며 저항했다. 감옥에서 만난 동지들과 비밀리에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쩌우는 뜨의 소식을 접한다.

1961년 8월 7일, 사이공은 물론 미국의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 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사이공 주재 미 대사인 프레드릭 놀팅의 차량이 폭탄 테러를 당한 것이었다. 사이공-자딘 지역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세력이 감행한 테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를 계기로 남베트남의 모든 도시에 반미·반독재 투쟁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사건은 사이공에서 미국에 가해진 최초의 공격이었다. 사이공의 모든 경찰 병력은 물론 특공대, 헌병대, 기무사가 테러 주모자를 잡는데 총동원되었다. 이 작전의 주모자 가운데는 26살의 레홍뜨가 있었다. 결국 레홍뜨와 동료들은 붙잡히고 1962년 4월 25일, 뜨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에서 뜨는 "수류탄이 부족해 미 침략자들을 전멸시키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감옥 안에서 뜨의 사형 선고 소식을 전해 들은 쩌우는 서럽게 울었다. 그가 사형집행을 당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감옥의 모든 연락책을 동원해 쩌우는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레홍뜨와 결혼을 서약한 사람입니다. 동지들 중에 누구든 그를 만나게 되면 이 말을 꼭 전해주세요. 나 응우옌티쩌우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쩌우의 전언이 뜨의 손에 가닿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또다시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감옥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던 어느 날, 쩌우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음식을 주고받는 바구니에 숨긴 비밀 서신이 간수에게 발각된 것이다. 황급히 종이를 삼키려는 쩌우에게 간수들이 달려들었다. 쩌우는 암실에 감금되었고 모진 구타와 함께 밤새 물고문이 이어졌으며 열 손가락에 못을 박고 팔을 잡아당기고 비틀어 관절을 뽑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쩌우가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자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한 후 경범죄 수감자들의 방에 던져 넣었다. 그곳은 나병, 매독, 임질 등 전염병 환자들을 수감하던 감방이었다. 그가 병에 걸려 죽기를 바랐지만 수감자들은 감옥 안에서도 명망이 높았던 쩌우를 극진히 간호한다. 이에 격노한 간수들을 쩌우를 다시 암실에 가두었다.

사경을 헤매던 쩌우는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직감한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뜨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호치민 주석의 사진도 떠오르고 고향의 가족들 얼굴도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갔다. 이대로 죽고 마는 것인가. 그때  쩌우의 눈에 누군가 떨군 머리핀 하나가 보였다. 쩌우는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머리핀으로 감방의 벽에 '흰옷'이라는 자작시를 써내려간다.

흰옷

나의 흰옷은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고
먼 훗날의 일을 꿈꿔본 적도 없는데
이제 비참한 수렁에 빠졌으니
이 흰 옷 언제까지나 하얗게 빛나길 바랄 뿐이네

1964년 말, 사이공 정부는 일부 학생들과 기자들에게 쩌우가 감금되었던 동물원의 암실을 견학시켰다. 감방문이 열리자 쩌우가 쓴 시 '흰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5년 5월, 자신이 투옥되었던 감옥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응우옌티쩌우.
1975년 5월, 자신이 투옥되었던 감옥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응우옌티쩌우.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탐방객들이 찍은 사진을 통해 이 시와 응웬티쩌우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에 대한 불법 구금과 고문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면서 사이공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쩌우를 포로 명단에 올려야 했고 이듬해인 1965년 5월 2일, 쩌우는 석방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쓴 네 줄짜리 시가 쩌우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쩌우의 시 '흰옷'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감옥의 정치범들 사이에서 애송되었고, 쩌우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시인 레안쑤언 또한 '흰옷'이라는 시를 지어 쩌우에게 헌사한다. 그리고 훗날 레안쑤언의 이 시가 '사이공의 흰옷'이라는 노래로 만들어져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구전되어 불리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쩌우는 만신창이었다. 그는 구찌 땅굴에 은신해 몸을 회복하면서 투쟁을 이어갔다. 이전과는 달리 쩌우는 베트남에서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그의 존재는 호찌민 주석에게까지 알려진다. 1969년 5월, 쩌우는 열사 응우옌반쫑이의 아내인 꾸옌과 함께 캄보디아로 건너가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에 도착한다. 쩌우의 이야기를 들은 호찌민 주석이 자신의 생일에 초대한 것이다. 지팡이를 짚은 '호 아저씨'가 나타나자 쩌우는 곧장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준비한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도 잊은 채 쩌우는 호 아저씨를 끌어안고 놓을 줄 몰랐다. 호치민은 레홍뜨의 안부를 물었다. 쩌우는 왈칵 눈물만 쏟으며 말을 잊지 못했다.

호찌민을 미소 짓게 한 '2kg'

생일상이 무색할 정도로 소박한 식탁에 마주앉았다. 호찌민은 직접 젓가락으로 쩌우와 꾸옌에게 고기를 한 점씩 집어주었다. "얘야, 너는 너무 말랐구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식당에 말을 하거라". 호찌민은 쩌우에게 밥을 많이 먹으라고 채근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과 7월, 8월까지 쩌우는 호찌민을 네 번 만난다. 그때마다 호찌민은 "여전히 말랐구나. 밥을 잘 챙겨 먹으라니까"라며 정겨운 잔소리로 쩌우를 맞이했다. 그러나 정작 호찌민 자신은 눈에 띄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호찌민을 마지막으로 만난 8월 14일에는 그의 몸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다. 털옷에 모자까지 둘러쓰고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호찌민은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호찌민은 위독한 상태였지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쩌우와 젊은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온 것이다. 호찌민은 쩌우를 보자마자 살이 좀 쪘는지부터 물었다. 몸무게를 재어 보니 34.8kg이었다. 체중계를 가져온 비서가 "예전보다 2kg이 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호치민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호찌민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969년 9월 2일, 쩌우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청년축제에 참가하고 있을 때 호찌민은 눈을 감고 만다. 

1969년 5월, 쩌우는 작가 응우옌반봉을 만났다. 그가 쩌우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처음엔 거절했다. 자기 자랑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자신이 세상에 노출되면 더 이상의 투쟁 활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베트남의 대표적인 혁명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또흐가 "남베트남의 학생운동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며 쩌우를 설득했다. 결국 쩌우는 응우옌반봉에게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것이 1972년에 장편소설 <흰옷>으로 탄생하게 된다.

이후 쩌우는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제에도 참석하고 구소련, 중국, 헝가리, 북한 등 각 나라의 독립기념행사에 참석하며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을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그 후 하노이에 돌아와 응우옌아이꾸옥대학(오늘날의 호찌민국가정치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다시 사이공으로 돌아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애인과 동지들을 석방시키기 위한 구출 투쟁을 이어갔다.

다시 만난 두 사람, 처음으로 손을 맞잡다

1975년 4월 30일, 드디어 기나긴 전쟁이 막을 내린다. 사이공을 비롯한 남부 베트남이 해방을 맞이하고 모든 정치범들이 석방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육지에 있는 모든 감옥 문이 열렸지만 쩌우가 애타게 기다리는 레홍뜨는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레홍뜨는 수 천 개의 감옥 가운데 가장 악명이 높았던 꼰다오 섬의 '타이거게이트'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를 비롯한 4300명의 사람들은 5월 4일이 되어서야 육지로 돌아와 사람들과 종전의 기쁨을 나눈다.

무려 2만 명에 가까운 목숨을 앗아간 꼰다오 감옥에서 살아 돌아온 레홍뜨도 15년 만에 쩌우와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5월 5일 밤 10시, 호치민시 10군의 인민위원회 주석 응웬티쩌우가 차를 타고서 이제 막 사이공에 도착한 뜨의 앞에 나타났다. 오랜 세월 쇠고랑을 차고 있었던 뜨의 두 발은 형편없이 굽어져 있었다. 수년간 전장을 누비고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은 두 사람은 아직 젊은 나이에도 흰머리가 무성했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굳은 언약은 없었어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마주잡은 손이었다.

 레홍뜨(왼쪽)와 응우옌티쩌우의 결혼식.
레홍뜨(왼쪽)와 응우옌티쩌우의 결혼식.베트남 사회적기업 아맙
그해 8월 19일, 두 사람은 오랜 기다림 끝에 부부의 연을 맺는다. 전쟁이 막 끝나고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라 결혼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동료들이 추렴해 모은 돈으로 차린 음식은 고작 떡 몇 접시와 차가 전부였다.

그러나 가족, 친지들만 불러 조촐하게 치르려던 결혼식에는 '세기의 사랑'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응웬티쩌우와 레홍뜨의 이야기는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이어졌다. 못다 들은 이야기는 다음날을 기약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응우옌티쩌우에게 어린 시절의 꿈을 물었다.

고향인 비엔호아에 살 때, 약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고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해 글자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워 선생님을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공직에서 은퇴한 그는 호치민시 어린이보호위원회에서 오래 활동했다. 어린 시절의 꿈을 말년에 펼친 셈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당당했고 후회는 없어 보였다. 인터뷰 내내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과 자신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고 수차례 힘주어 말하곤 했다.

우리가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하자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용과를 한 아름 안겨주는 쩌우의 모습은 인정 많고 푸근한 동네 할머니를 닮아 있었다. 골목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드는 노부부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면서 가로등 아래 백발만 하얗게 빛났다. 순간, 언제까지나 하얗게 빛나길 바라던 그 흰옷이 살포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에 실린 글을 필자 허락을 구해 실은 것입니다.
#응우옌티쩌우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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