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이희훈
스승이신 김수행 선생께서 작고하셨다. 한 시대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나는 마치 아버지를 잃은 것과 같은 비통한 심정으로 선생의 행장(行狀)을 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쓰는 이 글은 앞으로 계속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선생은 1942년 일본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성장하셨다. 빈한한 가정 형편 탓에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시고, 장학금을 위해 연식정구 특기생으로 대구상고로 진학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신 것으로 장학금에 대한 보답을 하셨다고 마음대로(!) 판단하신 선생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진학을 위한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 수석으로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셨다.
1968년 즈음에는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재학하면서 경제학과 조교로 근무하셨다. 당시의 조교는 오늘날과는 달리 교수(전임강사)로 승진하는 예비 교원의 신분이었다. 같은 시기 조교로 근무하시던 분들이 다 교수로 승진하였으나 선생은 그해 여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신영복 선생과의 개인적 인연이 빌미가 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시고 결국 서울대에서 쫓겨나셨다.
서울대를 나오신 후 외환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하시던 중 사모님과 만나 결혼을 하셨고,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아마도 엄혹한 유신 치하였던 서울과는 다른 런던의 자유로운 공기가 다시금 선생의 꺾인 학구열을 되살려 놓았나 보다. 사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선생은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을 다니시면서도 공부를 너무 하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연년생과 쌍둥이로 세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그건 단지 이루지 못할 꿈과 같은 것이었다. 보다 못한 사모님께서 런던 현지법인에 취직을 하시면서 선생께 다시 공부하실 것을 권하셨다. 사모님의 헌신과 격려 덕에 선생은 사표를 내고 런던 대학에서 타의에 의해 중단 당했던 학자의 길을 다시 이어 나가시게 되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쓰는 선생의 '행장'20대에 한국에서 진보적 경제학자의 길을 걸으시려다 좌절하셨고, 이역만리 런던에서 사모님께 가족 부양의 짐을 떠넘긴 채 어렵사리 다시 시작하는 마당에 왜 선생은 하필이면 마르크스 경제학을 선택하셨을까? 선생이 다시 공부를 시작하던 때의 한국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유신독재의 한가운데였는데 말이다. 만약 선생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 자리를 잡으시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선생께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에 부임하신 얼마 후 술자리에서 제자들이 여쭈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선생의 결의와 신념에 찬 어떤 말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이 친구야, (마르크스가) 좋아서 했지. 공부는 좋아서 하는 거지 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야."
이 대화는 몇 년 후인 1990년대 초 한창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을 때 학회의 토론장에서도 재현되었다. 후배 또는 제자 그룹의 소장 학자들이 (소련이 붕괴한 상황에서) 우리는 왜 마르크스를 공부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선생은 똑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그 토론장의 분위기는 일순 싸하게 가라앉았고, 혹자는 선생의 말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아마도 신념의 문제를 개인적인 선호의 문제로 말씀하신다는 것이 그 비판의 취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제자들이 '교수가 되기 위하여' 혹은 '취직을 위하여' 학위논문 주제에서 마르크스를 직접 다루는 것을 회피하더라도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으며, 본인의 전공을 벗어난 낯선 주제의 논문들도 최선을 다해 읽어주시고 고쳐주셨다. 그리고 선생보다 더 '신념에 투철했던' 후배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마르크스 경제학과 결별해 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끝까지 한결같은 마르크스 경제학자의 자리를 지켰다.
선생이 어렵사리 마르크스로 학위를 마칠 즈음에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신군부의 광주학살로 다시 봉쇄되었으나 한 번 봉인이 풀린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한 열망은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저변에서 싹이 트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하나의 도도한 흐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1982년에 선생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운영 선생과 함께 당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학이었던 한신대학교에 몸담으시게 되었고, 당시 젊은 진보적 후배 소장학자들을 불러들여 한신대를 명실공히 진보적인 학풍의 대학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셨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대학의 재단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셨기에, 학내 지배구조의 민주화를 요구하시다가 얼마 안 되어 정운영 선생과 함께 해직되셨다.
몇 년 동안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하시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은 끝에 1989년 진보적 경제학자의 영입을 요구하던 대학원생들의 시위에 힘입어 어렵사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되셨다. 타의로 서울대를 떠난 지 실로 20년 만의 일이었다.
선생은 48세에 서울대에 부임하셔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본론>을 완역하셨으며, 퇴임하실 때까지 학부와 대학원에서 자본론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하셨다.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 등에서 활동하셨고, 맑스코뮤날레, 사회실천연구소, 사이버노동대학 등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셨다. 한국경제발전학회와 한국사회경제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셨고, 서울대 퇴직 후에는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자본론> 이외에도 루돌프 힐퍼딩의 <금융자본>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 경제학의 고전들을 번역하셨고, <자본주의경제의 위기와 공황><자본론의 현대적 해석><세계대공황><자본론 공부> 등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선생이 사준 네 번의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