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뢰머광장의 정의의 여신(Justitia)과 니콜라이교회
정기석
평생 처음 나라 밖을 나가 첫발을 딛은 땅이 프랑크푸르트다. 정확하게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이다. 쉰이 넘어 2014년 5월 대산농촌재단에서 보내주는 유럽농촌공동체 연수단을 따라 나선 것이다. 물론 살면서 외국에 나갈 기회는 몇 차례 있었으나 귀찮거나 절실하지 않았다.
사람 사는 곳이 나라 안이나 밖이나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느냐, 사람 사는 일이야 어디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편견이 강했다. 한마디로 외국의 역사, 문화, 자연, 생활환경 따위에 흥미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참 모자라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일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 일단 정리정돈이 참 잘 되어 있는 사회였다. 보이는 곳마다 대개 깨끗하고 반듯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었다. 그러니까 자연은 마구 훼손되고 사람들은 제 분수와 주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풍경이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는 한국과는 다른 차원의 국가이자 사회처럼 보였다.
프랑크푸르트 중심, 뢰머광장(Roemerplatz)에 들어서 광장에 우뚝 선 정의의 여신(Justitia) 상을 마주보면서 그 느낌은 더 강해졌다. 정의의 여신상이 발산하는 정의로운 정기와 상서로운 주술이 짜릿하게 전해졌다. 독일은 사람들이 다르게 사는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라는 예감이 점점 사실로 다가왔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의 발코니에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환호와 찬사를 한 몸에 받은 한국인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아니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 차범근입니다."뮌헨에서 생각나는 한국인이 전혜린이라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단연 차범근이다. 독일교포인 통역가이드, 그 자신이 축구광인 박동수씨가 뢰머광장의 구 시청사 건물을 바라보며 그 사실을 거듭 상기시켜주었다.
분데스리가 1부 팀인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축구팀의 차범근 선수는 만년 하위권의 팀을 단숨에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발군의 활약을 펼친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4년간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며 122경기 46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오죽했으면 독일 국가대표 축구감독이 독일 귀화까지 권유했겠는가.
특히 1979~80시즌 팀 역사상 최초로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을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당시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고 프랑크푸르트로 개선, 시청 발코니에 서서 뢰머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는다. 외국인 최초로 한국인 차범근 선수가 시청 발코니에 선 것이다. 그것도 들러리가 아닌 단연 주역이었다. 훗날 시청 발코니에 선 두 번째 한국인은 그의 아들 차두리 선수였다.
조국이 가혹한 군부독재에 시달리던 그 암울한 시절, 그는 불우한 한국인 동포들을 위로해준 거의 유일한 영웅이자 희망이었다. 그가 바로 한국인에게는 정의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동아시아 변방의 축구선수가 당당히 실력 하나로 세계 최고의 축구 무대인 독일의 분데스리가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한국인. 그 시절 한국 땅에서 들리는 기쁜 뉴스는 차범근 선수의 활약 소식 밖에 없었다고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