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질 좋고 맛있는 빵의 비결은 바로 사람의 '손맛'이 아닐까.
화월당내 전시사진 촬영
순천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포(老鋪) 빵집 유년시절 많은 어깨동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 장래 희망은 빵 공장 직원이었다. 빵집도 아니고 빵 공장인건, 그때 우리 동네엔 '빵집'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시내에나 나가야 OO제과 같은 가게들이 있었고 파운드 케이크, 카스텔라 같은 고급 빵들은 언감생심 유리를 통해 바라만 봐야 했다. 다행히 삼립크림빵, 소라빵, 도나쓰, 소보루, 슈크림빵 등 비교적 비싸지 않은 빵들이 있어 가끔씩이나마 '빵욕'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귀한 빵이었지만 다행히도 학교에서 급식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에선 미국식 영양학을 따라 학생들에게 매일 우유와 빵을 먹였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우유와 빵을 먹는 아이들은 매달 급식비를 낼 수 있는 중산층 가정 이상이었다.
6.25 전쟁 때 피난민으로 어린 나이에 굶주림을 톡톡히 겪은 아버지를 둔 덕에 나도 학교에서나마 급식으로 나온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육성회비(育成會費 : 학교의 재정으로 미치지 못하는 교육시설·학교운영 등의 비용을 학부모들이 부담했던 납입금)는 제때 못내도 3남매 자식들의 급식비만큼은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2층 양옥집에 사는 친구네 놀러갔을 때 친구 어머니가 내어준 제과점 빵은 급식빵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때까지 어른들 질문 응답용 판사·의사 말곤 별 꿈이 없던 내게 나중에 빵 공장에 취직해서 제과점 빵만 골라 마음껏 먹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됐다. 그땐 제과점 빵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진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기차여행, 간이역 여행을 종종 할 적마다 우리 근대에 일제의 영향이 참 크구나 느끼곤 했는데 빵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빵'이란 말 또한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18세기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면서 빵을 수입하게 된 일본인들은 빵의 포르투갈어 '팡데로(Pao-de-lo)'를 '팡'이라 불렀다. 19세기 서양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져온 빵은 처음엔 '서양떡'이라 불렸으나, 후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