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6월 캠프 미니왕카 직원과 함께.
한도원
나는 평안도 후창 고향집에서 자랄 때 아버지와 꽃밭을 가꿨던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는 집 마당 앞뒤 울타리 주변을 보기 좋게 빙 둘러 꽃밭을 만들어서는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등을 심으셨는데, 나는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했었다. 종종 아버지는 나에게 물을 주라며 만주 여행 중에 사오신 작은 물조리개를 들려 주셨다.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만개한 어느날에는 온 집안 식구들을 모아 놓고 사진을 찍으신다며 야단법석이셨다.
어렸을 적 '꽃밭 가꾸기' 기억이 가져온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와제피 아저씨는 내가 원하는 대로 소똥 흙을 트럭으로 날라다 주는가 하면 삽이나 경작기 등 갖가지 원예도구를 사다 주었다. 일이 생각보다 커진 것에 조금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으나 왠지 모를 자신감이 들었다. 일단은 며칠에 걸쳐 캠프 입구를 비롯하여 메인 오피스, 식당 앞 등 눈에 띄는 곳에 화단을 만들었다. 직원들이 오며가며 내가 화단을 만드는 것을 눈여겨 보았다. 반신반의 어떤 꽃밭이 만들어질까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내가 만든 꽃밭은 그해 여름 캠프 미니왕카 직원들 사이에서 단연 화젯거리가 되었다. 꽃밭이 완성이 되고 나서 몇 주가 지나고 촉촉히 비가 내린 어느날, 만개한 꽃을 보고는 하루종일 '원더풀!' 소리가 캠프 사이트를 울렸다. 오며 가며 마주친 직원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내게 '땡큐'를 연발했다. 특히 와제피 아저씨는 "미시간 모래 땅에 꽃을 피웠다!"며 과분할 정도로 칭찬을 해주었다.
내가 만든 꽃밭은 섬머 캠프가 시작되어 전국 각지에서 캠퍼들이 몰려 들면서 다시 화제에 올랐다. 캠프 미니왕카는 기독교 수양관으로 대학 교수, 교사, 청소년들은 물론 기업가들이 리더십 훈련차 오는 곳으로, 캠퍼들 가운데는 매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캠프장 입구에서부터 그동안 보지 못했던 꽃밭을 보고는 모두가 "어, 이 예쁜 꽃밭이 언제 생겼지?"라며 한 마디씩 했다. 어떤 이들은 내가 꽃밭에 물을 주는 것을 보고는 다가와서 친절하게 인사말을 건네기도 했다.
미시간 호변의 땅들은 모래가 많아서 여간 신경을 쓰지 않고는 꽃밭을 가꾸기가 쉽지 않았다. 거름흙을 적당히 섞어주고, 잡초를 제거하고, 허물어져 내린 둑을 돋아주고, 소나무 껍질 등으로 표면을 덮어주는 일 등 할 일이 많았다. 나는 매일 잠에서 깨자마자 눈을 비비고 달려 나가 꽃밭이 무사한지 살피는 일부터 했다. 꽃잎 끝에 작은 물방울들이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것 또한 매우 상쾌한 일이었다.
캠프 미니왕카에서 만난 '철학자 회장님'여름 캠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이었다. 물을 주고 있던 귀품이 있어 보이고 키가 껑중하고 깊은 눈을 가진 할아버지가 내게 다가왔다. 노인이 악수를 청하며 내 손을 덮석 잡더니 물었다.
"자네 이름이 미스터 도원, 맞지?"
"예, 그런데요."
"내 이름은 윌리엄 댄포스일세. 자네가 만든 꽃밭 얘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지."
"감사합니다."
"내 거처가 이 근처인데 한번 놀러오지 않겠나?"
"어떻게 찾아가죠? 여기 지리도 어두운데."
"아, 아무에게나 물어보면 돼."그날 저녁 캠프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직원들에게 윌리엄 댄포스(William Danforth)라는 할아버지로부터 초청을 받았는데 그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캠프 미니왕카와 동물 사료와 시리얼을 만드는 랠스톤 퓨리나 컴퍼니(Ralston Purina Company)의 창립자이자 회장이었다. 꽃밭 하나로 미국 굴지 회사의 회장과 인연을 맺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는 삶이 우연의 연속이라고 했다는데, 나의 경우도 우연의 연속이었고, 이 우연이 종종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이번의 우연은 내 삶에 결정적인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다음날 윌리엄 댄포스 가족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시간 호변의 비치 하우스를 찾아 갔다. 반갑게 나를 맞이한 댄포드 회장은 저녁을 대접하고는 미시간 러미(Michigan Rummy)라는 카드 놀이를 하자고 했다. 나는 미시간 카드놀이를 그로부터 배워서는 3시간여 동안이나 게임을 즐기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일부러 져 주었는지, 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게임을 내가 이기자 댄포스는 '초짜의 행운'이라며 축하해 주고는 매일 놀러오라고 했다.
나는 이후로도 거의 매일 그를 방문하여 카드 게임을 즐겼고, 그의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댄포스는 당시 '4면의 삶'(Four-Fold Living)이라는 생활철학 서적을 출판하여 각광을 받고 있었다. 그의 책은 육체적으로(Physically), 정신적으로(Mentally), 영적으로(Spiritually), 사회적으로 (Socially) 조화를 이루는 삶에 대한 책이었다. 캠프 미니왕카도 그의 생활철학을 기조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는 행운의 두 스승이 생기게 되었다. 캠프 디렉터 '와제피'가 실생활의 모범을 보인 스승이었다면, 윌리엄 댄포스는 삶의 방향을 이론적으로 지목해준 스승이었다. 미국생활 첫해에 이들에게서 받은 깊은 감화 덕에 나는 거의 매년 여름 캠프 미니왕카에 와서 자연과 벗삼아 일하면서 나의 내면세계를 살찌울 수 있었다.
내 스스로는 어렸을 적부터 독서를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서 나름의 사색을 해 왔었고, 탈북하여 한국에서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항상 삶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힘써 왔었다. 한국 땅에서 꺼져가는 등불처럼 위기에 처했다가 되살아나는 체험을 할 때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따위의 실존적인 질문을 던졌었다. 어느날엔가 한 친구가 이르기를 "네가 매일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산다면, 그거야 말로 공허한 삶이다"라는 충고를 해주어 기도하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때로는 기적같은 체험을 하곤 했다.
하지만 미시간의 미니왕카 캠프에서 두 스승을 만나면서 비로소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일확천금'의 삶이나 세상을 호령하는 '명예' 보다는 자연과 어울리고 인간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으며 사는 삶에 대한 그림이 비로소 그려지게 된 것이다. 나는 두 스승의 말없는 가르침 속에 무엇을 위해, 어디에 목표 두고 살 것인가를 캠프 미니왕카의 숲 속을 거닐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들을 만나는 순간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두 잘 먹이는 학문'을 전공으로 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