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당
천지 원전 사택은 있지만, 직원들이 주로 포항에서 출·퇴근하는 바람에 인구유입 효과는 바랄 수 없었다. 부산·울산·서경주·광주 등 원전 단지 인근 도시에서 출퇴근하는 다른 곳의 사례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꺾여버린 블루 로드 때문인지 예전의 생기는 찾기 어려웠다.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금과 지역 자원 시설세가 요긴한 지역사업에 쓰이기도 했다. 목돈이 드는 그럴듯한 시설물을 올리는 데도 썼다. 천지 원자력본부가 군과 마을 행사에 협찬도 많이 해줬다. 몇몇 사람들은 영덕에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하고 다녔다. 전력 생산량에 비례해서 돈을 받게 되니까 6기 규모는 되어야 충분하다는 근거를 댔다.
여기에 동조하는 군민들이 없어 작은 소동으로 끝났다. 아마 그 무렵인가,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은 바뀌고 있는데, 영덕만 30~40년 전의 구시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경제활동은 성장만을 좇는 방식에서 벗어나서 사회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더 의미있는 곳에서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다. 통일은 안 됐지만 왕래는 꽤 자유로워졌다(뉴스에서는 북한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 통일도 시간 문제라고 한다). 에너지난에 시달렸던 북한은 일찍이 재생 가능에너지에 눈을 돌려, 에너지 생산량은 적지만, 오히려 한국보다 재생에너지 비중은 더 높다고 한다(초기 설비들의 잦은 고장으로 보수하는 데 일손이 달릴 정도라고 한다).
어쩌면 영덕은 지역발전의 시기를 놓친 건지도 모른다. 위험과 맞바꾼 돈, '원전 머니'를 밑천 삼아 어업과 농업에 투자하거나 도시화에 매진했더라면, "군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지 모를 일이다. 물론 한 20년 겪다 보니 원전에 적당히 적응하며 살고는 있다.
고독한 영덕도리어 이제는 원전에 대한 걱정보다는 영덕군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영덕이 지속 가능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저출산 고령화'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고령사회로 바뀐 지 오래다. 대도시에서 농촌과 중소도시로 인구가 이동하는 게 유행인데, 울진으로는 거의 오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은 일이 많아졌다. 원자력 방재 훈련이다 뭐다 해서, 사이렌 울리면 이리저리 움직여야 할 일이 성가실 정도다.
2005년에 가동된 풍력발전단지로 영덕은 전력 100% 자립이 가능했다고 한다. 영덕과 함께 신규 원전 부지로 선정됐지만, 건설을 거부한 삼척은 대신 태양광과 바이오매스 등을 활용해 이제는 먼 곳에서 에너지를 가져오는 일이 확 줄었다고 한다. 영덕에도 그런 재생 가능에너지 설비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곳 원전에서 쓰는 전기는 어디에서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도서관에 간 김에 옛날 자료를 더 찾아보니 흥미로운 책들이 눈에 띈다. 사라진 노물리·석리·매정리의 과거를 담은 책자를 보니 새롭다. 지금은 망향탑만 남아 있는 자리에 있었을 마을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책장 한쪽에 먼지 쌓인 책 <위험한 동거 : 강요된 핵발전과 위험경관의 탄생>도 있다. 핵발전의 위험을 기록한 것 같은데, 원전이 들어설 당시 그리고 원전과 함께 생활하면서 변화하는 주민들의 반응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심이 간다.
핵발전소의 "위험경관"이라. 정확한 뜻은 알기 어려우나, 핵 자체의 위험보다는 이 위험이 문화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려 한 듯하다. 아쉽게도 영덕은 나오지 않지만, 이전 네 곳에서 원전 단지가 들어설 때와는 분명 다른 상황이었을 것이다.
위험한 동거를 끝낼 상상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