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창비
시외버스를 탑니다. 시외버스를 달리면서 시를 읽습니다. 시집 한 권쯤 시외버스에서 가볍게 읽습니다. 도톰한 책을 한 권 꺼내어 또 읽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서울로 시외버스는 으레 다섯 시간 가까이 달립니다. 시집 한 권에 도톰한 책 두어 권쯤 넉넉히 읽을 만합니다. 책을 손에 쥐는 동안에는 바퀴 구르는 소리라든지 창문이 덜덜 떨리는 소리를 하나도 못 듣습니다. 오직 책에 깃든 이야기만 내 마음으로 스며듭니다.
안희연님이 빚은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2015)를 읽습니다. 나이가 퍽 젊다고 할 안희연 님은 "네 슬픔"이 아닌 "너의 슬픔"이라고 글을 씁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말은 "내 슬픔"이지만, "나의 슬픔"이라고 하는 일본 말투를 써야 말맛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막일' 같은 한국말은 말맛이 안 나서 '노가다'라고 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퍽 많습니다. '농땡이'나 '땡땡이' 같은 일본말을 써야 비로소 '노닥거린다'거나 '빼먹는다'거나 하는 몸짓을 더 살갗 깊이 느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꽤 많아요.
나는 땅에 작은 집을 그리고 / 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 //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물속 수도원)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간다. 차창마다 똑같은 옆모습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를 가졌지. (입체 안경)
요즈음 시외버스에는 창문이 있되 창문을 못 엽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시외버스도 고속버스도 공항버스도 온통 통유리 버스입니다.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부터일까요. 예전에는 시외버스도 통유리가 아니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시외버스였어요. 버스에서 멀미를 하는 사람이 많아 버스마다 비닐봉지가 대롱거렸어요. 우리 어머니는 나랑 형을 시외버스에 태울 때면 언제나 비닐봉지를 여럿 챙기셨고, 어머니도 멀미를 하고 나도 멀미를 했습니다. 버스가 구불구불한 길을 여러 시간 달릴 때면 멀미를 여러 차례 하고는 해쓱해진 채 버스에서 내리기 일쑤였습니다.
요새는 거의 모든 시외버스가 통유리일 뿐 아니라, 멀미를 하는 사람도 부쩍 줄었지 싶어요. 애써 비닐봉지를 챙겨서 속을 게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많이 어린 아이들이 버스에서 과자나 빵을 지나치게 먹다가 우웩하고 게우는 일만 더러 있을 뿐입니다.
참말 사회도 문화도 문명도 시설도 아주 빠르게 바뀝니다. 이처럼 빠르게 바뀌는 흐름에 맞추어 사람들 몸하고 마음도 빠르게 바뀔 뿐 아니라, 말도 생각도 빠르게 바뀌는구나 싶어요.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과 / 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 사이에서 / 그는 내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습니다 (피아노의 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빚은 안희연님한테는 어떤 슬픔이 끼어들었을까요. 시를 쓰는 안희연님은 이녁 이웃이 느끼는 슬픔 가운데 어떤 슬픔을 맞아들일까요.
슬픔이 끼어든다고 할 적에는, 또 네 슬픔이 끼어든다고 할 적에는, 내가 여러모로 슬프고 괴로운데 네 것까지 나한테 얹혀진다는 뜻입니다. 내 슬픔으로도 벅차거나 힘든 마당에, 네 슬픔이 끼어들어 곱절로 벅차거나 힘들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 / 다정히 춤을 추고 있다 // 물처럼 흔들리는 무릎과 / 호주머니 속의 못들 (포르말린)날려 보내도 기어이 되돌아오고 / 더듬더듬 그 새를 살피고 / 이름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 (호우)전라남도 바닷가를 낀 시골자락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서울까지 가는 길에 쉼터를 두 차례 들릅니다. 그나마 요새는 고속도로가 곳곳에 많이 뚫려서 두 차례를 쉰다고 할 만합니다. 예전에는 세 차례도 쉬고 네 차례도 쉬었을 테지요.
고속도로가 늘어나서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만큼 시외버스는 창문을 꼭꼭 여밉니다. 통유리로 된 버스가 고속도로를 아주 빠르게 달리니, 예전에 예닐곱 시간이나 일고여덟 시간쯤 걸리던 길을 너덧 시간이면 가뿐히 달립니다. 예전에는 기나긴 길을 달리며 창문바람으로 멀미를 식히거나 가라앉혔다면, 이제는 멀미를 할 만큼 머나먼 길이 아니라고 할 만합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사회와 문화와 삶이라고 할까요. 새로운 사회와 문화와 삶에 맞추어 시도 소설도 문학도 모두 새로운 흐름이 불거진다고 할까요. 이제는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매우 적으니까,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늙고, 서울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까, 오늘날 사회에서는 '고향은 그냥 서울'인 흐름으로 뿌리를 내리지 싶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버이 고향도 서울이요 아이 고향도 서울인 흐름이 굳어지지 싶어요. 전라말이나 경상말은 한 번도 들을 수 없이, 그저 서울에서 살며 표준말만 듣고 교과서와 영화와 책과 연속극에 나오는 표준말로만 생각을 다스리는 흐름으로 뒤바뀌지 싶어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몹시 드문' 아이들도 시골말이나 고장말은 거의 듣지 못하면서 서울 표준말로만 배우고 방송이나 영화를 보면서 자라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