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선생님은 나에게 변화를 권하며 꽃이 되면 나비가 되어 춤추겠노라는 편지를 보내주셨다.
오문수
'ooo 별세. 광주 oo병원.'
퇴직 후 집에서 지내는 내게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지난 15일이었다. 후배가 보낸 메시지를 보자마자 욕을 했다. 분노의 욕을 뱉은 후 한 마디 덧붙였다.
"천년만년 살 것 같더니, 말 한 마디 않고 가?"상스런 욕을 했지만, 허탈했다. 망자가 죽기 전 한 마디 하고 갈 것 같은 생각에 행여나 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옆에 있던 아내가 눈을 크게 뜨고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 여보! 무슨 일 있어? 조용하던 사람이 웬일이야?""이 메시지 좀 봐. ooo이 죽었네. 천년만년 살 것 같이 기고만장하더니."나를 투사로 만든 사람 가난했지만 형제들과 싸움 한 번 안 하고, 욕도 안 하고 살았던 내 입에 욕을 붙여준 사람. 내게 인간에 대한 증오를 심어준 사람. 분노로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했던 사건이 발생한 지 올해로 정확히 10년째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전라남도 여수시에 위치한 한 사립 중학교였다. 사립인지라 이사회의 제청으로 이사장이 교감 승진자를 결정한다.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2003년, 그 때 부터 교사들은 혁신학교를 만들자며 그 방안 중 하나로 인사시스템 개정을 논의했다.
인사위원회에서는 당시 청와대가 실시했던 인성다면평가를 도입했다. 전국 어떤 사립학교에서도 도입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120문항을 이용해 후보자를 평가하고 교장·교감을 비롯한 전 교사가 참여했다. 논의 과정 중에 관리자 평가 점수가 낮다는 지적에 교장·교감 점수(40점)과 나머지 교사 점수(60점)를 합해 평가했다.
후보자들의 평가 결과가 비슷하면 교장·교감이 얼마든지 좌우할 수 있었다. 인성다면평가 결과 점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공립과 동일한 평정 점수를 부여했다. 2005년 연말의 일이다. 학교에서는 차기 교감 승진 자격연수대상자 선정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고, 이사장과 상임이사가 3명의 후보자를 면담했다.
교장은 5일이 지나고, 10일이 지나도 결과를 밝히지 않았다. 교사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평가 결과가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고 의구심이 커져가던 보름 후, 교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1위가 아닌 2위를 교감 후보로 선정했다. 뻔히 다 아는 결과를 뒤집은 이사장과 교장의 처사에 분노한 교사들은 서명을 하고 이의신청서를 작성해 이사들을 찾아갔다.
당시 충격에 싸인 교사들과 교장은 충돌했고 학교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사장 명령에 불복한 교사는 파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분노한 교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등을 떠밀었다.
"형님! 학교를 혁신하고 인사를 바로잡으려는 지난 2년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를 비웃고 있는데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교장실에 가서 결과를 확인하고 오세요."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들은 "네 까짓게 감히?"라는 식으로 비웃고 있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결과는 내가 1등이었고, 그것도 2등과 8점이나 차이가 났다. 교사들은 안다. 교사 평가는 소수점 3자리부터 시작한다는 걸. 8점이면 하늘과 땅 차이다.
울분을 터뜨리고 있던 내게 지인으로부터 제보가 들어왔다.
"저것들 이틀 전에 이미 끝내버렸어요."그날 밤 잠 한숨 못 잤던 나는 다음날부터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채 출근했다. 한복 차림으로 아무말도 안 하는 나를 본 교사들은 항명을 하며 집단 서명을 시작했고, 기자들이 학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 당했지만, 결코 불의에 질 수는 없었다.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출근해 교장실 앞에서 "밤새 안녕하셨지요?"라고 묻고는 교실로 돌아와 아무 말도 안 한 채 근무했다. 10여일 동안 교장실 앞에서 시위를 하자, 그는 출근도 못하고 교장실 주위를 빙빙 돌았었다. 그가 너무 미워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