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골이 그 여자, 참 고마웠어요

[30일, 제주를 달리다 27] 그 스물다섯 번째 날 -1

등록 2015.11.16 11:47수정 2015.11.16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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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날 저녁, 협재 해변 모습
전날 저녁, 협재 해변 모습 황보름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틀었다. 시간을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음악 소리에 기대 다시 한 번 잠들려고 노력하려던 그때, 2층 침대에서 다리 하나가 쑥 내려온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그녀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일출 보러 가나?

이어폰에선 아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너무 많이 들어 가사도 거의 다 외운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리며 다시 눈을 꼭 감고 잠의 세계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아델 목소리 중간중간 끼어드는 거침없는 '드르렁, 드르렁' 소리가 나를 현실 세계에 그대로 있게 한다.


옆 침대 2층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연예인 누구를 꼭 닮은 사람, 울산에서 왔다는 그녀가 코를 골고 있던 것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코 고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첫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중국인 어머니의 코골이는 참을 만했다. 소리도 그리 크지 않았고 잠에 빠져드니 코골이도 잠잠해졌다.

그 뒤, 남원읍에서 만났던 그녀. 나는 그녀의 코골이 소리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새벽에 방을 나와 게스트하우스에 딸려있던 카페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또 다른 그녀. 그녀가 몇 시부터 코를 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저 우렁찬 소리 속에서 4시간이나 잘 수 있던 게 행운 같았다.

아델의 노래를 들으며 이후로도 얼마간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이젠 정신마저 말똥말똥하다. 잠을 포기해야 하나. 그래, 포기다. 이제는 코 고는 소리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다.

휘적휘적 방문을 열고 나온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사람 한 명이 홀로 서 있었다. 그 사람도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온 나 때문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까 방문을 열고 나갔던 그녀다.

나는 소리 죽여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일출 보러 가신 거 아니에요?"
"아니요.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나왔어요."
"아, 흐흐흐. 저도요."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깨울 것 같아 대화를 멈췄다. 시계를 보니 아직 5시도 안 됐다. 나는 대충 창가 소파에 기대앉았다. 눈은 졸린데 이미 정신은 완전히 깼다. 책을 읽을까 하다가 그만뒀다. 흠, 심심해서 그녀에게 또 말을 걸었다.


"여행 며칠 오신 거예요?"
"안 정해놨어요. 언제 갈지 몰라요."
"와, 멋있다. 저도 여행한 지 20일이 넘었어요."
"와, 대단하네요. 저는 20일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아무 생각하기 싫어서 온 거예요. 제가 회사를 그만뒀거든요. 아직 뭘 할지는 모르겠고요. 당장 뭘 할지 결정하기도 싫어요. 그래서 이번 여행도 아무 계획 없이 왔어요. 오늘은 어디 갈지, 내일은 어디로 옮길지도 다 미정이에요."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 오늘 밤 같이 제주 막걸리나 마시자는 약속을 하며 끝맺었다. 사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저녁이 되면 우리는 이곳 거실에서 만나게 될 거였다. 지난밤 보니 여기 분위기가 그랬다.

어제 마라도에 갔다가 이곳 협재 해변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왔다. 이곳의 첫인상은 딱 잘 꾸며진 가정집이었다. 구조 때문이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방이 세 칸 있었고, 각 방에는 2층 침대가 세 개씩 놓여 있었다. 그중 방 하나가 남자 방, 방 두 개가 여자 방이었다. 거실은 책으로 가득했고, 바다 쪽으로 난 창 앞에는 긴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반대쪽 창가에도 소파와 자그마한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넓은 거실 한쪽엔 테이블도 되고 의자도 될 수 있는 네모상자가 몇 개 쌓여 있었다.

MT 온 것처럼 거실로 모여드는 사람들

거실 이곳저곳에 띄엄띄엄 앉아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지나쳐 나는 먼저 보내 놓은 내 캐리어(여행용 가방)를 찾았다. 그때 스태프 한 명이 말을 걸었다. 내 이름을 확인하고 화장실과 샤워실의 위치, 간략한 제약사항을 알려준 뒤 방 배정을 해주었다. 방에다 짐을 부리며 생각했다. 왠지 이곳, 나랑은 안 맞을 것 같아. 다음에 묵게 될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걸어 방이 있는지 확인한 후 밖으로 나와서 아까 그 스태프에게 물었다.

"제가 여기 3박을 예약했는데요. 혹 마지막 박은 취소 가능할까요?"

아까 방 배정을 해줄 때와는 사뭇 다른 차가운 목소리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안 돼요."

며칠이 안 남은 상황이어서 환불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환불 안 해주셔도 돼요. 전 2박만 하고 나갈게요. 마지막 박은 손님 받으세요."

돈은 아까웠지만, 그래도 2박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다른 사람들에겐 매력적일 것이 분명한 이곳 게스트하우스가 나는 처음부터 불편했다. 구조 자체가 사람들을 너무 가깝게 했다. 화장실을 가다가도 거실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거실에서 쉴 때조차 혼자 있을 수 없었다. 화장실, 샤워실은 남녀 공용이었다. 지금껏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들 중 가장 친밀함을 요구하는 이곳, 내겐 2박이면 충분해 보였다.

짐을 부리고 협재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다 저녁이 되어 돌아온 난, 2박이면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꿀 행동도 했다. 각 침대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모아 거실로 함께 나왔다. 부엌에는 지난 게스트들이 두고 간 라면과 막걸리가 가득했고, 스태프들은 맘껏 먹어도 된다고 말해줬다. 우리는 테이블 하나를 잡고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잔에 막걸리를 한 잔씩 따랐다. 실실 웃으며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잔을 짠, 하고 부딪혔다.

어둠이 깊어지니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여행에서 돌아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거진 스무 명의 사람들이 테이블을 길게 붙여 MT에 온 마냥 둘러앉았다. 스태프가 둘러앉은 우리에게 말했다.

"11시까지만 놉니다. 그 뒤 불을 끌 거예요."

사람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거실로 모여드는 게 신기해 옆에 앉은 사람에게 물어보니 여기 분위기가 원래 그렇단다. 이곳에서 벌써 3박을 묵었다는 능글맞은 게스트 한 명이 분위기를 완전히 주도했다. 이제 막 도착한 게스트도 막무가내로 자리에 앉혀 자기 소개를 시키고, 방에서 나와 화장실을 가려던 사람도 붙잡고 놓아주질 앉는다. 억지로 앉혀진 사람들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여행지이니만큼, 사람들은 주로 여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주로 오늘 갔던 곳에 관해 이야기했고, 또 서로 좋은 곳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이만하면 꽤 많은 사람이다, 싶었는데도 어디선가 사람들이 자꾸 들어와 이상해서 물어보니 2층에도 방이 있단다. 결국 2층에서 내려온 사람들까지 다 모여 함께 놀았다.

재미있기는 했지만 스태프가 오후 11시까지 시간을 정해준 게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눈이 감기는 걸 애써 참으며 열심히 놀다가 11시로도 부족했는지 2차를 가겠다며 나간 사람들을 제외한 몇 명과 조금 더 이야기하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코 고는 소리에 깨서 다시 거실에 나앉은 거였다.

코 고는 그녀 덕에 보게 된 협재 해변의 아침

 코골이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협재 해변의 아침
코골이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협재 해변의 아침 황보름

 코골이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협재 해변의 아침
코골이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했을, 협재 해변의 아침 황보름

거실이 조금씩 밝아왔다. 어둠이 느릿느릿 떠나고 있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부지런을 좀 떨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협재 해변에나 나가볼까? 나는 옆에서 졸고 있는 그녀를 슬쩍 한번 보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인데도 그렇게 춥지 않았다.

골목길을 걸어 협재 해변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부산하던 해변은 온데간데없고, 흐릿한 아침을 맞고 있는 조용한 해변만이 그곳에 있었다. 저 하늘 위 낮게 떠오른 태양 말고는, 해변엔 아무도 없었다. 해변 주위 상가와 카페를 둘러봐도 아직 나와 있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나는 갑자기 코를 골던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덕분에 협재의 아침도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거대한 병풍처럼 솟아있는 비양도를 향해 해변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나는 이제서야 이번 여행에서 한 번도 물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축이기는 했지만, 발을 담가본 적은 없었다. 바다를 보기만 했지, 바다를 즐긴 적은 없었던 거다.

스무 살, 대학 동기들과 이곳 협재 바닷가에 놀러 왔던 것이 기억났다. 그땐, 옷을 입은 채로 바다에 풍덩 빠지기도 했는데. 수영도 못하면서 바다에서 노는 게 겁이 나지 않았었다. 친구가 이렇게 많은 데 빠져 죽기야 하겠느냐,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를 떠올리며 바닷물에 발을 담가봤다. 지금은 수영도 할 줄 아는데 왠지 조금 긴장이 됐다. 풍덩 빠질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바닷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얼음물 같았다. 정신이 아주 바짝 드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반바지가 젖지 않을 만큼만 바닷속으로 더 들어갔다. 무릎 언저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을 보며 별 의미 없이 이쪽저쪽으로 걸어 다녔다. 그렇게 걸어만 다녔는데도 신이 났다.

역시 사람은 재미있게 놀아야 하나. '재밌다, 재밌다'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간다. 주위가 한결 밝아졌다. 드디어 아침이다. 아직 해변을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나는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골목길을 걸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스태프 한 명이 나와 아침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감자, 양파 등을 팍팍 썰어 넣어 수프를 끓이고, 부엌 여기저기에서 식빵, 잼, 달걀, 오렌지 주스, 우유를 내놓는다. 커피를 내리더니 테이블을 길게 붙여 놓는다. 얼추 8시가 다 됐다.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나오기 시작한다. 퉁퉁 부은 얼굴로 어색하게 인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얼른 아침을 먹고 가장 먼저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내가 오늘 타고 갈 버스는 배차시간이 40분이랬다. 늦지 않게 곶자왈에 도착하려면, 서두르는 게 좋을 터였다. 난 오늘 곶자왈에 다시 한 번 도전한다.
덧붙이는 글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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