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쿵!다다 히로시 글. 그림 / 정근 옮김, 보림
보림
여기 커다란 사과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 어느 숲 속 들판에 커다란 사과가 쿵, 떨어졌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 것일까. 두더지가 달려와 사과 속으로 뛰어들었다.
개미도 야금야금 사과를 먹고, 나비와 벌들도 사과를 향해 날아들었다. 다람쥐와 돼지도 냠냠냠, 너구리와 여우는 아삭아삭 배불리 먹었다. 어느 가을 날, 평화로운 숲 속에서 행복에 겨운 포만감이 빨갛게 무르익었다.
커다란 사과 앞에서는 개미와 돼지도 친구가 되고, 다람쥐와 여우도 웃는 사이가 된다. 스스로 멈출 때를 결정한다. 뒤늦게 알았다고 투덜거리지도 않고, 빨리 먹는다고 나무라지도 않는다. 각자의 습성과 취향대로 한 끼 즐거운 식사를 한다.
배부른 동물들은 다음 누군가의 행복한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켜준다. 내일 먹을 양식을 따로 챙기지도 않는다. 이 순간의 배부름에 만족한다. 오직 두더지만이 장난을 치며 사과의 보드라운 속살을 떠나지 못한다. 어디가나 이런 개구쟁이 녀석들은 꼭 하나 있는 법이지.
어느 날 상암동 축구장에 '세상에서 가장 큰 사과'가 떨어진다면 말이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축구장을 꽉 채울 커다란 사과라면, 전 세계의 카메라가 요란한 플래시를 터트리며 달려들 거야.
그 사진을 보면서 외계인이 보내온 사과라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어떤 사람들은 성분 분석부터 해보자고 샘플을 채취할 거야. 사과 속에 들어있을 위험물을 확인하기 위해 차단벽부터 설치하자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사과가 상하기 전에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자고 캠페인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겠다.
그러다 힘 센 사람들이 미사일을 싣고 오면 어쩌지? 이 사과를 접수하겠다고 선전포고라도 한다면,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겠는 걸. 사과 앞을 서성이던 힘없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이 사과를 독점하려는 다른 무장 세력이 나타난다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도심의 축구장에서는 사과의 달콤한 행운이 참담한 비극으로 종료되는구나. 이 커다란 사과 앞에서 숲속 친구들처럼 행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만찬의 기쁨으로 무르익은 숲 속에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방울을 바라보면서 동물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하지만 걱정 없어요."그들이 향한 곳은 사과의 너른 품이었다. 커다란 사과를 발견한 주인공답게 임기응변까지 뛰어난 동물들이다. 배가 부르면 사과의 고마움도 잊을 법 한데 말이야. 탁월한 상상력으로 사과를 향해 시선을 돌린 동물들이 영특하다.
그리하여 사과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우산'이 될 영광을 선사했으니... 커다란 사과를 먹을 충분한 자격을 갖춘 동물들이다. 사과의 놀라운 변신을 이뤄낸 동물들의 풍부한 상상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쓸모를 다한 사과가 숲속 친구들의 커다란 우산으로 재해석 되는 놀라운 변화는 어떻게 찾아온 것일까. 사과를 발견한 우연 속에 어떤 필연이 느껴진다.
삶의 시간에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사과가 매달려 있다. 사과가 떨어질 시기를 가늠하기란 어렵다. 이 사과가 불행과 행운 중 어느 쪽으로 낙하할지도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아는 사실은 예측 불가능한 커다란 사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사과를 어떻게 할지 걱정 많은 사람들에게 이 그림책 속의 상상력은 유쾌하기 짝이 없다. 사과심이 앙상하게 드러난 사과라면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흉측하게 잘려나간 울퉁불퉁한 단면과 누렇게 갈변된 색깔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런 사과를 향해 뛰어갈 용기를 낸 숲속 동물들의 지혜가 부러울 따름이다.
너의 손자국이 잔뜩 묻어 있는 그림책을 다시 펼쳐보면서, 쓸쓸한 미소가 지나갔다. 놀라운 관찰력으로 사과를 우산으로 변환시킨 상상력을 일상에서 발휘한다면, 삶은 그림책처럼 아름다울 텐데.
너는 엄마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과 한 알 같은 아이였다. 너를 통해 엄마는 세상을 깊게 바라보는 안목을 배워나갔다. 떼를 쓰는 울음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하는지도 처음 알았다. 안 된다는 말을 어떻게 부드럽게 해야 하는지도 서툴게 연습했다. 넘어지는 걸 어떻게 바라볼지도 준비해나갔다. 엄마의 손길 속에 머물고만 있을 너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부쩍 자란 넌 엄마의 시선을 귀찮아했다.
쌀쌀해진 아침 날씨에 두꺼운 점퍼를 꺼내줘도 그 점퍼 입기 싫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후에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고 우산을 챙겨줘도, 꼭 그런 날엔 비가 오지 않는다면서 모른 척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허겁지겁 나서는 너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엄마의 가슴은 쿵, 내려앉았다.
"이제 그만 좀 걱정해! 비 한 번 맞는다고 안 죽어."너의 눈에 엄마는 걱정만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일까. 떨어지는 빗방울 앞에서 걱정 없다고 말하는 숲속 친구들처럼 너에게도 너만의 생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사과를 단순한 사과로 보지 않을 만큼 너의 마음 속에도 탐스런 생각의 나무가 자라나는 것일 텐데. 너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인가 보다.
집어 들었던 우산을 다시 우산꽂이에 놓아두었다. 창 밖으로 언제 빗방울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무심한 하늘이 보였다. 비에 젖어 감기만 걸려봐라. 쯧쯧 혀를 차면서도 찌뿌둥한 하늘이 맑게 개기를 바랐다. 걱정 없는 하루를 위해 발휘해야 할 상상력이 무엇인지 쨍쨍한 해님은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자식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엄마의 빈약한 상상력에 대해 괜찮다고 방긋 웃어줄 것 같았다.
사과가 쿵! - 0~3세
다다 히로시 글 그림,
보림, 1996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공유하기
언제 '쿵' 하고 떨어질지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