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김정일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옛 서울이 어떤 모습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가 대치동에 있는 은마아파트에서 살았기에 곧잘 그곳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할머니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함께 사셨기에 할머니를 뵈러 인천에서 서울 대치동까지 갔어요.
내가 처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서울 대치동은 인천에서 '너무 먼' 서울입니다. 인천역(하인천역)에서 전철을 타서 한참을 달린 끝에 신도림역에 닿으면, 신도림역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탑니다.
1970년대 끝자락하고 1980년대 첫무렵에는 인천하고 서울 사이에 복숭아밭이 제법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천하고 서울 사이 전철길에서는 퍽 먼 데까지 아스라이 내다볼 만했습니다. 요즈음처럼 아파트가 우줄우줄 솟지 않았으니까요.
인천은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까지 몇 군데 아파트를 빼고는 5층이 넘는 건물이 드물었어요. 낮은 건물과 다닥다닥 붙은 골목집 마을이 사라질 무렵 비로소 서울로 접어드는구나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여름에는 창문을 열며 바람을 쐬던 전철이고, 겨울에는 오들오들 떨며 손을 호호 녹이던 전철이었지요.
그나저나 서울에서 땅밑을 달리는 전철을 타면 귀가 멍하며 답답했습니다. '서울사람'은 어떻게 땅밑으로 길을 내어 이런 끔찍한 전철을 타나 싶어서 '나는 서울에서 돈도 집도 준다 해도 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전철을 타고도, 지하철로 갈아타고도 작은아버지 댁에는 안 닿았습니다. 어디에선가 전철을 내려서 택시를 타는데, 서울은 찻길에 자동차가 매우 많아서 조금 가다 서고 신호등에 걸리고 아주 괴로워서 택시 타지 말고 걸어가자고 아버지를 졸랐던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1982년 어느 날 신문 지면에, 지금으로 말하면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40여 개의 개발지구가 발표됐다. 투기의 시작이며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발점이다. 이 신문 쪽지를 가지고 한 군데씩 지워 가며 촬영을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