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백남준 그루브_흥(興)'전 미술관에 게시된 대형사진으로 "황색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보인다
김형순
백남준은 30살에 플럭서스 창시자인 친구 '마치우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1962)"라고 했고, 60살에 "세계(서구)역사는 우리에게 그 규칙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 규칙을 바꾸라고 가르쳐준다(1992)"라고 했다. 이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세계적 발언이다. 이중에서도 서른에 한 백남준의 '황화론'은 더욱 인상적이다.
'황색재앙', 이것은 13세기 초 유럽인이 몽골로부터 침공을 당하면서 받은 공포감을 뜻한다. '바로 나다' 이건 "국가는 바로 나다"라는 루이 14세의 말에서 온 것으로 영어· 프랑스어를 합성해 "짐은 황화[黃禍]다(Yellow peril c'est moi)"라고 패러디한 것이다.
백남준 그가 문화 황제가 되어 전 세계를 쓸어버리겠다는 소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온몸에 전율이 왔다. 백남준은 실제 30년 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이 말을 실현했다. 그는 확실히 그 이전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되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 이유도 있었다. 백남준 집안은 당대 최초의 재벌이었다. 동대문 창신동 저택이 3천 평이나 되었고 한국에 캐딜락이 2대 밖에 없을 때 집에 1대가 있었고 차 수리공만 10명이나 되었다. 부친 백낙승씨는 1920년대부터 천대이상의 방직기를 갖춘 '태창방직'의 최고경영자로 일본 메이지와 니혼 대학 상대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의 부친의 여권번호가 6번이고, 백남준이 7번이었으니 그렇다면 당시 대통령, 국민총리, 장관급 다음 순위이지 않은가 싶다. 대단하다. 그의 조부 백윤수씨 역시 당시 포목점 중 과반이상을 독점하는 거상이었고 조선말기 왕실에 비단과 장례옷감 등을 댔다.
백남준은 유럽에 유학 가서 이미 한국에서 다 배웠기 때문에 여기서 더 배운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1945년 해방기 경기중학교에 다닐 때 집에 일본 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사상전집' 등이 많았나보다. 그걸 다수 읽은 것 같다.
그가 독서광이라는 건 1995년 소설가 김훈과 한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김훈은 백남준에게 모국어로 쓴 책을 어디까지 읽었냐고 묻자 그는 '이태준, 정지용, 유진오, 한설야, 박태준, 김기림'을 읽었다고 했다. 그중 정지용이 단연코 최고라고 했다. 그의 비주얼한 언어와 상징적 의미가 담긴 날카롭고 가파른 언어구사에 매료됐다는 것이다.
17살에 한반도를 떠난 백남준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한국의 기원은 아주 먼 곳 페루까지 올라단다. 그는 또 '조선', '만주', '몽골', '터키', '헝가리(훈족)', '핀란드'는 말 타는 습관 등으로 볼 때 3천 년 전엔 우리와 한 혈통이라고 봤다. E. 데커, 리비어가 저술한 백남준 연구서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