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경주침식곡석불좌상]앙상한 나뭇가지에 포근히 둘러싸인 머리 없는 부처가 고요하다.
남병직
석불좌상이 자리한 곳은 백운계 심수곡 제1사지로, 일명 석수암(石水庵)으로 불린다. 이는 절터의 북쪽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에서 유래된 것이다. 곳곳에 드문드문 흩어진 기와 편들은 절터의 숨은 내력을 넌지시 일러준다. 석불좌상은 머리가 없지만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앉은 품세는 바르고 편안하다.
목에는 생사 윤회의 인과(因果)를 뜻하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삭둑 잘려나간 머리처럼 윤회의 사슬도 미련 없이 끊어버렸다.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차림에 부드러운 가슴의 곡선이 아담하되 당당하다. 왼손은 아랫배에 단정히 두었고, 오른손은 위엄으로 땅을 누른다. 마귀를 항복시키는 거룩한 부처의 수인(手印)은 장중하다.
경주남산을 답사하다 보면 유독 머리 없는 불상이 종종 눈에 띈다. 혹자는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과 조선시대 임진왜란 등 외침과정에서 진행된 불교유적의 파괴를 한 원인으로 들고 있다. 또 다른 이는 조선시대 유생들에 의한 숭유억불정책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필자는 이와 더불어 불상의 제작기법과 관련된 부분을 추가로 가늠해본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돌로 불상의 전신을 제작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정교한 작업공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몸과 머리, 손 등을 별개로 만들어 각각 조립하는 형태가 권장되고 있다. 이렇게 조립된 불상의 경우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결합부분의 구조적 약화로 인해 불상의 훼손이 더욱 심해질 수가 있다.
위와 같은 제작기법을 따른 경주남산의 석불로는 보물 제666호 경주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慶州南山 三陵溪 石造如來坐像)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상기 석불의 경우 일제강점기 조사에 의하면 불두를 신체와 별석으로 제작해 촉을 꼽아 결합한 것으로 보고된다. 석불의 머리가 없어진 사연이야 제 각각일 테지만 인고의 세월 속에 질곡의 역사를 간직한 돌부처는 지금도 중생의 염원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