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의 조카 이동휘(왼쪽 두 번째)가 <경상일보> 대표이사를 지내던 1991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CATV 91 국제전 일본 견학 세미나'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동휘는 "<경상일보>에도 CATV를 접목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일본의 종이신문과 CATV 를 연구하고자 일본에 간 것"이라고 밝혔다.
이동휘
박정희 정권 2인자로 불리다 12·12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던 이후락(HR· 아래 존칭 생략)은 2009년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경기도 광주 도자기공장 도평요에서 칩거하며 일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일체의 언론 접촉을 피한 것도 그 배경이다.
하지만 HR은 간혹 자신이 권력의 중심부에 있을 때 가깝게 지냈던 인사들과 접촉하며 때로는 일부 사안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신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돕기 위해 나선 일이다.
HR은 권력 중심부에 있을 당시 서울의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던 동생 이거락에게 "노후를 내가 책임질 테니 축재하지 말라"고 했고, 동생아들 조카 이동휘에게도 자신을 보필하는 것에 대해 장래를 보장하는 언질을 했었다. 하지만 돌연 벌어진 10·26과 이에 따른 몰락으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내심 미안함을 가졌다. 이에 이동휘가 지역 언론에 참여할 때 도움을 주려 했던 것.
권력 상실로 챙겨주지 못한 조카 위해 나선 이후락HR이 신군부에 의해 권력에서 쫓겨나자 가신이던 이동휘는 한일의원연맹 실무자를 지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평소의 꿈이던 일본 로비스트가 되기 위해 HR로부터 소개받은 일본 정치인들과 교류하는 등 꿈을 키워가던 1989년, 이동휘는 중학교 동기인 최일학(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의 권유로 최일학의 외삼촌이 창간한 울산지역 최초 일간지 <경상일보>에 참여하게 된다.
(관련기사 : 이후락은 왜 정주영의 대선 출마를 말렸나)이동휘는 그 과정에서 HR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HR은 이동휘를 위해 친분이 있던 당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경상일보>와 <국제신문>은 엇갈린 운명을 맞게 된다. 다음은 이동휘의 증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