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지난해 11월 12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참사로 희생되지 않았다면 수험생이되었을 단원고 학생 250여명을 추모하는 '250개 책가방을 모아 별이 된 아이들을 기억해 주세요 - 아이들의 책가방' 행사가 열렸다.
권우성
세월호 운동에서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들에는 모두 각각 다른 결들이 있고 각각의 문제점들이 따로 있다. 예컨대 수능시험일에 희생된 학생들의 가방을 전시하던 퍼포먼스는 입시경쟁교육의 상징인 수능시험이라는 행사를 정상적 관례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희생된 학생들이 '당연히' 수능시험을 봤을 것이라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반복해서 언급된, '유가족'을 '단원고 학생 희생자의 부모'로 묘사하는 것의 문제점도 있을 것이다.
이런 세세한 것들을 하나하나 따지자면 내용이 넘칠 테니 개략적인 이야기만 해보겠다. 크게 봐서 세월호 운동에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방식은, 청소년을 피해자의 위치에, 비청소년을 책임자·권력자·주체의 위치에 놓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세월호 운동에 참여하는 비청소년들이 "아이들아 미안하다"를 외치고 그러한 정서를 공유할 때, 많은 청소년들은 비청소년들의 보호와 부양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지, 함께 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고 함께 만들어나가는 주체가 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교육 때문이라는 분석은, 교육의 주체는 비청소년(교사, 부모)이며 청소년은 그 교육의 대상이라는 기존의 구도를 깨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는 "가만히 있으라"를 비판하는 것이든 '4.16 교육체제'이든, 결국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한다는 논의가 되고 만다.
사실 '청소년'에 초점을 맞춘 많은 논의들은 세월호 참사를 마치 청소년 또는 교육에 관련된 특별한 사건인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참사를 바라보는 초점을 흐리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은 청소년들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희생자=아이/청소년", "가해자/책임자=비청소년"이라는 단순화된 구도가 만들어져버린다. 교육이 원인이라거나 선내 방송을 상징화한 "가만히 있으라" 같은 표어들은, '체제 순응'과 '저항'이라는 해석의 틀을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 틀이 과연 유효한지는 의문스럽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순응해서 죽은 것인가? 가만히 있지 않았으면 되었다는 말인가? 그런 해석틀과 구도의 극단적인 결과물이, 간혹 등장하는 아전인수 격의 해석과 인용일 것이다. 발달장애인 직업능력개발센터가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발달장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하느냐며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게 세월호랑 똑같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 아이들 어떻게 책임질 거냐?"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그냥 쓴웃음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오늘의 교육 제30호, 하금철, <발달장애인 공포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인용).
그 옳고 그름이나 바람직함의 여부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겠지만, 그런 청소년에 대한 논의의 밑바탕에는 어떤 동기, 어떤 감정이 있는지부터 한번 생각해보자. 그런 말들 속에서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이 당혹감과 무력감이었다고 하면 좀 과한 것일까?
수백 명이 죽은 사건 앞에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을 필요로 했으며, 이렇게 하면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해답을 원했다. 4.16 교육체제라는 명명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교사/교육청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어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 못 되게 말하자면 알리바이를 만들며 안심하기이고, 좋게 말하자면 무력감을 피해서 뭐라도 해보려는 시도라고 할까. 세월호 참사 앞에서 수많은 말들이 나오는 현상은 마치 뭐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세월호 참사에 관한 많은 말들, 특히 청소년에 관한 말들을, 잠시 멈춰 서서 다시 재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만의 문제는 없다